[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⑨] 붉은 얼굴·긴 수염에 담긴 관우의 시각적 이미지

2019-06-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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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염원 담은 충절·의리 상징…모범적 통치자 모습 형상화

명나라 시대부터 관제묘 전파…전 세계에 ‘관제문화권’ 형성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서울 지하철 역 가운데 ‘동묘앞’ 역이 있다. 이 역은 1호선과 6호선 환승역이고, 동묘 근처 구제시장이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으로 익숙하다.

동묘는 관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다. 정식이름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고,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중국의 관제묘를 본떠 건립됐다. 현재 한국에서 관제묘는 서울을 비롯해 안동, 성주, 남원, 전주, 김제, 강진, 완도, 영동, 강화, 인천 등 각지에 세워져 있다.
 

서울 동관왕묘(왼쪽)와 안동 관왕묘. [사진=다음 캡처]


관제묘는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 사당이다. 한국을 포함한 일본, 베트남 등의 한자문화권은 물론, 동남아,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화교 화인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거의 빠짐없이 있다. 관우는 죽은 지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는 사당에서 관제라고 불리며 ‘관제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중국 산시성 원청시 관제묘, 베이징 옹화궁 관제상, 베트남 수부하내 관제묘, 일본 요쿄하마 관제뵤. [사진=바이두 캡처]


관제묘의 확산은 전통 시기 통치자들이 충의와 의협심을 상징하는 관우를 관료제 확립과 체제 안정을 위한 정치적 이용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관우는 송나라 시기 현열왕(顯烈王), 의용무안공(義勇武安公) 등의 칭호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명나라 시기에는 협천호국충의관성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등으로 추서됐다. 황제의 반열로 격상된 것이다. 특히 명대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일반 백성들의 집마다 관우를 모실 정도로 활성화됐다.

민간에서는 삼국 이야기가 크게 인기를 얻으며 관우의 존재는 삼국의 주인공 조조, 유비, 손권 이상으로 부각됐다. 이야기 속 관우는 주군이자 의형제 유비가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충성했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전통적인 유가 체제에서 가장 모범적인 역할 모델이었다. 일약 통치자와 백성들의 바람이 모두 반영된 이상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강렬한 중심인물이 됐다.

이 같은 관우의 특징은 시각적으로도 표현됐다. ‘삼국지 통속 연의’ 제1회에 “키가 9척에 수염이 2척, 얼굴은 잘 익은 대추 같고 입술은 연지를 바른 듯하며 봉황 눈과 누에 눈썹에, 위풍당당하고 늠름한 모습(身長九尺, 髥長二尺, 面如重棗, 脣如塗脂, 丹鳳眼, 臥蠶眉, 相貌堂堂, 威風凜凜)”이라고 묘사됐다. 전통극에 등장하는 관우 검보와 분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관우 검보(왼쪽), 경극 '관우' 중 한 장면. [사진=도서출판 학고방 제공(왼쪽), 바이두 캡처]


붉은색은 적심(赤心)을 의미하는 것으로 충절과 의리를 상징한다. 바로 관우의 ‘잘 익은 대추’같이 붉은 얼굴은 사실적인 인물 형상 묘사라기보다는 후대 통치자와 백성의 간절한 염원의 상징적인 반영이다.

이후 관우의 시각적 형상은 중국 전역에 전형화돼 널리 확산됐다. 관제묘의 관우상에도 적용됐다. 전 세계 관제묘의 관우상 역시 예외 없이 같은 모습으로 전해져 세계인의 관우에 대한 시각적 인상은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이다.

관우는 유교, 불교, 도교, 각종 민간신앙 등에서 숭배대상이 됐다. 또 전쟁, 사악(邪惡), 질병, 재앙을 물리치는 무신(武神), 상업을 관장하고 재산을 늘려 주는 재신(財神), 시험에 합격시켜 주는 신 등 다양한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동묘 주변 상권은 조선 시대부터 형성됐고, 현재는 크고 작은 점포가 수천 개에 이른다. 왜란 때 신령으로 나타나 적을 물리쳐 줬다던 무신 관우가 재신으로 역할을 바꿔 동묘 근처 시장을 ‘관할’하는 듯하다.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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