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바바리맨이었다" 지식인 이중성 논란

2019-06-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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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뒤틀린 사람, 이중인격의 대표자 …

치명적 자만의 뿌리, 가장 위험한 책을 쓴 사람”

 
 

[루소]

[

[정숭호의 '책에서 책으로(5)'] 루소는 많은 사람이 비난했다. 루소는 ‘바바리맨이었다’는 욕도 있다. 역사책을 많이 쓴 영국 저널리스트 폴 존슨(1928~ )의 <지식인의 두 얼굴>에 나온다. ‘말과 행동이 다른 지식인 13명의 이중성을 파헤친’ 이 책 맨 앞은 루소가 차지하고 있다. 존슨은 “루소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여성들에게 아랫도리를 까보이곤 했다”고 쓰고는 바로 뒤에 “내가 여자들 눈앞에서 노출을 하면서 얻은 어리석은 쾌락은 뭐라 설명할 도리가 없다”라는 루소의 육성을 그의 <고백록>에서 옮겨다 놓았다.

루소가 누구인가. 1712년에 태어나 1778년 죽은 그는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라는 외침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고,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왕정을 종식시켰다는 ‘위대한 사상가’ 아닌가. 신과 종교도 인간 이성보다 앞설 수 없다고 선언한 루소로 인하여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았는가. 존슨은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누가 가장 루소를 닮았는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는 말도 전한다. 이런 ‘위인’이 왜 이중인격자들의 대표가 되었는가? 언행불일치는 99.999%의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루소는 극단적이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옹호했던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루소를 이중인격자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루소는 생각 자체가 틀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생각이 틀린 사람의 행동이 바를 리가 없다”라는 태도다.

하이에크는 “우리는 모든 인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지도자들의 치명적 자만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멸망한다”고 단언한 사람이다. 그는 “루소가 치명적 자만의 뿌리”라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로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루소의 대전제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에서 루소 비판을 직접 들어보자. “루소는 자유인은 모든 ‘인위적 구속’에서 벗어나길 원한다고 하였다. 루소는 사람 사이의 정연한 협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전통이나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짜의지, 또는 ‘일반의지’라는 걸 창안하였다. 그 의지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의 유일한 존재, 한 개인이 된다’라고 생각했다. 루소의 사상은 자연적 본능에 대한 학습된 억압이 아니라, 자연적 본능이 <창세기>의 가르침과 같이 우리가 자연을 정복하도록 해주는 그러한 근대 지성적 합리주의의 치명적 자만의 중요한 근원일 것이다.”

좀 어렵다. 나는 하이에크의 이 말을 내 나름 정리해보려 한다. “인위적 구속은 루소의 생각처럼 강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동물적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면 인간은 끝없이 싸울 수밖에 없다. 이 본능을 억제해야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통과 관습, 이성은 이런 인식 속에서 질서가 되었다. 이 자생적 질서가 확장돼 도덕과 법이 됐다. 전통과 관습을 따르고 도덕과 법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 그게 한 집단이 살아남는 길로 인식되었다.”

“시장경제도 마찬가지다. 생존과 번영에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필요한 걸 바꿀 수 있는 체제가 자급자족 체제보다 훨씬 유리했다. 그러려면 남의 것을 남의 것으로, 즉 빼앗아서는 안 되는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물질적 재산은 물론 ‘육체와 의지와 모든 권력을 국가에 바치며, 나 자신과 나에게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게 루소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신봉자들의 신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가 봐왔듯이 이 신념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루소는 치명적 자만의 뿌리다.”

하이에크의 스승인 미제스도 루소를 비판했다. 하이에크는 300페이지 남짓한 <치명적 자만>에서 루소를 여섯 번 비판했지만 미제스는 17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 <인간행동>에서 단 한 번,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 인간이 사회화하면서 원시적 야만 상태의 행복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슬퍼하는 것은 낭만적 헛소리다. 루소가 자신이 향수 어린 동경심에서 묘사했던 원시 상태에서 살았더라면, 자신의 연구와 집필에 필요한 여가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한 게 전부다. 루소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게 하나도 없으니 길게 언급할 것도 없다는 투다.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은 <시빌리제이션>에서 “루소의 책 <사회계약설>은 서양 문명이 창조한 책 중 가장 위험한 책으로 꼽힌다”고 썼다. 이 짧은 한 줄에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루소 비판이 압축돼 있다.

루소를 비난하는 대열 앞줄에는 괴테도 있다.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에게는 호의적이었던 괴테는 혁명의 원인 제공자인 루소에 대해서는 “그를 생각하면 그토록 아름답게 조직된 정신이 뒤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고 <이탈리아 기행>에서 말했다. “루소는 미쳤다”고 하고 싶은 걸 참고 점잖게 “정신이 뒤틀렸다”고 한 것 같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는 “감상주의자는 개인적으로 매우 잔인한 인간일 수 있다. 진보적 사상에 눈물 흘릴 줄 알았던 감상주의자 루소는 자신의 친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주장했던 루소가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이를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은 부자들을 욕하면서도 부자들에 기대 살았던 행각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위선으로 꼽힌다.

루소가 바바리맨임을 알려준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에는 루소 외에, 마르크스, 입센, 톨스토이, 헤밍웨이, 브레히트, 러셀, 사르트르, 오웰, 촘스키 등 ‘지식인 중의 지식인’들의 언행불일치가 자세히 나온다. 이 책 원제는 그냥 <지식인 Intellectuals>이다. ‘두 얼굴’을 뜻하는 건 없다. 이중적이지 않은 지식인은 없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이 한국 사람에게서는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그런 사람을 보는데 그 책을 왜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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