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세인 세계적인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가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을 무대 위로 올린 이유는 분명했다. 예술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는 르빠주가 1인극을 통해 한국 관객들을 만난다.
르빠주는 29일부터 6월2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887’을 공연한다. 연극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후 12년 만의 내한이다. 자신이 연출한 작품에 직접 배우로 나선다.
거장은 기억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드러냈다. 작품의 제목인 ‘887’은 바로 르빠주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주소에서 따온 것이다. 7명의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던 비좁은 아파트는 현재도 머레이(Murray)가 887번지 같은 자리에 존재한다. 르빠주는 뉴욕타임즈를 통해 “아주 큰 건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직접 가보니 작고 비좁더라.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27일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르빠주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그만큼 감정적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르빠주는 “행복했던 기억을 우선 찾아봤다. 누나와 부활절에 찍은 사진이 있더라. 작품에 사용하려고 디지털로 확대해보니 나의 얼굴 표정, 눈동자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이후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나쁜 기억을 떨쳐내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기억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사회적인 상황에도 눈 떠야 한다. 르빠주는 “작품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1960년대 캐나다의 문화적,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일깨움을 담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퀘벡은 2차 세계대전 후 계급, 계층적인 마찰이 심했었다. 택시 운전사이셨던 아버지는 당시 상위 계층이 쓰는 영어 단어를 가르쳐주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을 작품을 통해 던진다.
르빠주는 혁신적인 기술을 무대에 접목시켜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예술가다. 오래 전부터 해오던 작업이다. 르빠주는 1994년 연극, 영상, 디자인, 음악, 오페라, 인형극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업할 창작집단 ‘엑스 마키나(Ex Machina)’를 만들었다. 엑스 마키나는 ‘기계 장치’란 뜻이다. 이후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줄곧 시도해왔다.
2010~12년 시즌에 걸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제작하고 르빠주가 연출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공연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작품이다.
르빠주는 무대 위에 무게가 무려 41톤이나 나가는 24개의 거대한 알루미늄 사각 기둥을 세우고, 이 기둥들을 수평축을 중심으로 음악을 따라 마치 살아 움직이듯 정교하게 회전시켰다. 동시에 영상과 조명 등 각종 첨단장치를 통해 오페라에 나오는 신화적인 배경을 관객들의 눈앞에 구현해 냈다. 2019년 가을에는 퀘벡의 듀빌 광장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아 만든 새로운 공연장 르 디아망을 개관할 예정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새로운 기술들을 매일 공부할 것 만 같았다. 노트북을 갖고 이메일을 보내는 것도 어렵다는 그의 고백은 반전이었다. 르빠주는 “주위에 젊은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역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기억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