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처음이었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국민참여재판의 이야기는 배우 문소리(45)가 있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곧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맡은 건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을 이끄는 판사 김준겸 역. 강한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재판에 임하지만, 심판을 반복하며 초심을 잃은 인물이다.
영화 '박하사탕'(2000)으로 데뷔해 '오아시스'(2002) '바람난 가족'(2003) '효자동 이발사'(2004) '사랑해, 말순씨'(2005)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스파이'(2013) '자유의 언덕'(2014) '아가씨'(2016) '여배우는 오늘도'(2017)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등 나열하기만 해도 벅찬 문소리의 필모그래피는 영화 '배심원들'의 자랑거리기도 하다. 넘볼 수 없는 그의 연륜은 곧 영화와 문소리가 맡은 역할의 신뢰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믿고 보는 배우'인 셈이다.
캐릭터에 관한 고민과 불확실성은 '배심원들'에 관한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문소리는 마지막 장면을 앞두고 유독 고민이 깊었다며 무거운 마음으로 혼자 1시간가량 양수리 세트장을 거닐었다고 말했다.
"피고인 선고 장면을 마지막에 찍었어요. 그날 아침까지 톤에 관해 고민했거든요. 혼자 양수리 세트장을 걸었는데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전반적인 것들을 다 만들어두고 연기했지만, 구체적인 준겸의 톤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감독님은 꾹 누르다가 마지막에는 카리스마 있게 칼을 휘두르는 식으로 가자고 하셨고 저는 '꼭 그렇게 가야 할까' 의문을 가졌죠. 여러 가지 고민을 가졌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런 과정과 고민들이 즐겁고 재밌는 거예요. 이 모든 게 가능한 팀이었던 거죠."
숱한 고민 끝에 문소리는 김준겸은 배심원의 반대편에 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그는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미묘한 지점들을 들어내려고 애썼다. "배심원을 가르치는 듯한 태도나 의견을 자르는 모습 등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김준겸이 원칙주의자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사를 풀어낼 수 없는데 이 인물의 미묘함을 어떻게 풀어낼까 정말 고민스러웠어요. 내 안에 (서사를) 깊숙이 넣고 있으면 자연스레 재판 과정에서 배어 나오지 않을까? 주장하지 않지만, 어느새 전달되게끔 방법을 찾자고 생각했죠."
문소리는 캐릭터에 깊이감을 주고자 했고 실제 판사들과 만나며 많은 점을 묻고 또 들었다.
"판사님들께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그 과정에서 느낀 건 판사도 우리 같은 사람이고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그걸 알고 나니 부담이 덜 되더라고요. 나만의 스타일로 판사에 접근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죠."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과 자신의 '위치'에 관해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에서 문소리와 김준겸이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테랑 배우이자 '여배우' '최고의 감독' '여배우는 오늘도'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영화학도를 가르치는 교수,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장준환과 운영 중인 영화사 '연두'까지. 그는 많은 '롤'을 맡고 있고 책임감 있게 끌고 나가려 한다.
"저도 (김준겸 캐릭터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기와 연출에 관해 말하자면 배우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히다가도 또 숨이 트일 때가 있거든요. 예컨대 헬멧을 썼다가 다시 벗고 컨디션 조절 후에 다시 쓰는 기분이라면 감독은 내내 헬멧을 쓰고 있는데 점점 더 조여오는 기분ㅇ 들어요. 숨을 쉴 수가 없죠. 배우는 캐릭터 뒤에 숨을 수 있는데 감독은 오히려 '이 영화는 저예요'라며 하더라고요."
쉴 새 없이 일하는 문소리에게 "워커홀릭이 아니냐"고 거들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맞받아친다. 그는 부정했지만, 꾸준히 기획, 제작 등을 이어가며 바쁜 일정을 보낼 예정이라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제작, 기획을 더 해볼 생각이에요. 최근에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한 작품을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더라고요. 물론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하하하. 프로듀서 친구들이 많아서 종종 이야기는 해보고 있어요. 책 읽다가 판권을 알아보기도 하고. 재밌게 할 수 있으면 좋겠죠. 물론 연기도 계속하면서."
감독, 기획, 제작 등 영화에 관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그. 문소리가 도달할 곳은 어디일까. '영화인으로서 지향점'이 궁금해졌다.
"책임감을 느끼고 또 가져야 하는 나이가 됐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흥미 있고 재밌어하는 길을 가고 싶어요. 그 과정이 중요한 거죠. 지향점을 두고 그곳에 가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즐겁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요. 흥미로운 것들을 탐험하며 영화, 연극, 드라마 등을 하고 싶어요. 계속 흥미로운 걸 찾아가면 다른 것들을 발견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