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사과는 왜 이리 귀할까, '사과의 정치학'

2019-05-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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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연합뉴스] 5월초 광주를 찾았던 황교안 한국당대표가 물세례를 맞았다.

# 에덴동산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낱말인문학] 성서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사과를 특칭하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 열매가 사과와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사과인가. 중세 신학자들은 이걸 연구랍시고 이렇게 증명해냈다. 첫째 붉은 빛깔을 보라. 사탄의 유혹같이 매혹적이고 아름답지 않은가. 둘째 그 맛을 보라. 단맛도 아니고 신맛도 아니지만 그 두 가지 맛이 다 들어있는 두 얼굴의 맛이다. 이 이중성이 악마의 진상이 아닌가. 셋째, 사과의 움푹한 곳을 들여다보라. 이브의 여성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넷째, 사과를 잘라보면 중심에 별이 나타난다. 선악과나무를 뜻하는 표식이다. 한결같이 어이없지만 이를 설명하는 학자들은 진지했으리라. 사과나무의 학명인 말러스 도메스티카(Malus Domestica)의 '말러스'는 맬럼(malum, 악(惡))에서 나왔다. 

북유럽 구전동화였던 백설공주는 17세기초 그림형제에 의해 새롭게 정리되었다. 이 동화는 사과를 다시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눈처럼 하얀 피부, 앵두처럼 붉은 입술, 칠흑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공주는 의붓어머니 왕비의 시샘을 받아 숲으로 쫓겨났다. 왕비는 할머니로 변신해 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먹여 깰 수 없는 잠의 저주에 빠지게 한다. 이 곤경이 왕자의 멋진 반전을 만들어주는 장치이긴 하지만, 거기에 사과는 애꿎은 악역을 맡게 된다. 
 

[장 밥티스트 카르포(프랑스, 1827~1875)의 '사과를 든 이브']


# 빌리 브란트의 사과, 아키히토의 사과

이 과일의 원죄 때문에 동음이의어인 사과(謝過)가 자주 논란을 부르게 됐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사과 행위'는 대체로 선악과의 사과나 신데렐라의 독사과가 지닌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서 흥미롭다. 사과는 단순히 용서를 비는 행위가 아니라, 잘못을 시인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주는 대단원의 해피엔딩은 '사과'가 지닌 아름다운 결말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잘못을 시인하는 일은 또다른 불씨를 내포하고 있기 쉽다. 그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과 그 잘못으로 인한 불리한 형편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모두 포함된다. 이것이 독사과일 수 있기에, 용기가 필요하며 그 후유증을 감내할 만한 여력을 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죄는 1970년12월7일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태인 위령탑 앞에 화환을 바치며 무릎 꿇어 사죄한 일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에서는 유태인 5만6천명이 나치에 학살 당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무릎 꿇은 것은 총리 한 명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독일은 1952년 룩셈부르크협정에 의거해 2012년까지 60년간 700억유로(약 92조65500억원)를 이스라엘 정부와 개인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독일의 우익들은 이런 행위와 조치들에 대해 격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1998년 5월 25일 당시 아키히토 일본국왕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은 건 영국 재향군인과 가족 20여명이었다. 이들은 일본대사관 밖에서 밤샘 농성을 벌이며 "일본은 2차대전중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에 대한 보상을 미루고 있다"면서 일왕의 사과를 요구한다. 이튿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일왕 부부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 앞을 지날 때, 영국재향군인회 1천여명이 몰려들어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주제곡인 '보기대령 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불렀다. 일본 수용소에 억류됐던 영국인 2만2천명 중 생존자는 1만5천명이었다. 일왕은 일본헌법에서 사과를 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 '오와비(사과)'라는 말과 '한세이(반성)'이란 말을 썼다. 이 말이 '샤자이(사죄)'와 '카이고(회개)'보다 낮은 수준의 사과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태도는 자주 비교된다. 독일은 뚜렷하고 책임감있는 사과를 한 반면, 일본은 마지못해 시늉만 하는 사과를 해왔다. 이는 일본내 지지율 하락을 의식해서였다. 

# 촛불시위 박근혜의 사과

2016년 10월25일 박근혜 당시대통령은 최순실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한다.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사과를 드립니다." 이 사과는 그러나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진상을 엄폐하는 행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과가 있은지 5개월만에 이와 관련한 문제로 그는 탄핵결정이 내려진다. 
 
사과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뭘까. 사과하면 불리해지며 두고두고 걸리적거리는 상황이 생겨날 수 있다. 사람들은 사과한 태도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과한 내용을 기억해놨다가 그것으로 공격한다. 사과는 문제의 진상을 지나치게 바로잡아 오히려 그렇지 않은 점까지 매도하게 만드는 빌미로 작용한다. 이런 예측이나 경험칙들이 '사과인듯 사과 아닌 사과같은' 사과를 하도록 한다. 가급적 책(責) 잡히지 않으려는 사과의 게임은 3가지 정도의 화술을 구사한다.

# 정치적 사과는 왜 '대충' 우물거리나

첫째는 if화법이다. "때린 건 아닌데 아팠다면 사과한다"와 같은 모씨 사과가 그것이다. 둘째는 hairsplitting(줄이기)화법이다. 2007년 지미 카터 전대통령은 자살폭탄이 특정상황에서는 합법적인 전략일 수 있다고 말했다가 비판이 일자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사과를 하지만, 내 입장에선 하나의 실수였다." 이후에 비판이 그치지 않자, 2009년 "나의 모든 말 혹은 모든 행동에 대해 사과한다"로 말을 바꾼다. 세째는 predicative choice(표현 선택)이다. 인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로 물의를 일으킨 빌 클린턴 대통령은 "난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안타까워한다(regret)"고 말을 했다가 여론의 질책을 받는다. 그러자 "사과한다, 내 책임이다"라고 2차 사과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했더라도 대충 사과하려는 본능은 '이브의 사과'보다 더 원천적인지 모른다.

5.18 모독발언에 대한 한국당과 황교안대표의 사과, 문재인대통령 인터뷰 태도와 관련한 송현정 KBS기자의 사과, '달창'발언과 관련한 나경원 원내대표의 사과 등, 다양한 문제와 관련한 사과 요구가 봇물치는 이 나라에서 '사과'는 그야말로 '정치공학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로 등장했다.  누구누구가 사과해야 한다고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온다. 사과는 사과해야할 내용에 대한 소통이다. 사과를 건넬 사람이 그 내용에 대해 진심으로 시인하고 그 문제 때문에 입은 피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행위다. 사과 행위는 사과자와 피해자가 이견없이 분명해지고 사과내용에 이견이 없을 때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사과를 요구하는 행위는, 저 두 가지 결과를 확정하기 위한 압박일 가능성이 크다. 사과를 요구하는 고함소리가 커지는 까닭은 '사과' 그 자체보다 '사과에 든 독'을 노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충사과'를 겨냥한 승복 시위인 셈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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