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초등학교 때 일이다. 그해 겨울 여행에서 일본을 대하는 시각을 접하곤 깜짝 놀랐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본은 나쁜 나라. 화산 폭발이나 쓰나미로 없어져야 한다.” 초등학생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이어 누가 이런 적개심을 심어주었는지 아연했다. 당시는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핏속으로 흐르는가보다 생각했다.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 식민지배까지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과잉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증오였다. 영화와 TV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통해 주입된 역사관이 원인이다. 지난 역사에서 일본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서먹한 이유다. 개운치 않은 역사 청산에다 우익 세력이 쏟아내는 망언도 해묵은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
물론 양심적인 지식인도 적지 않다. 오늘 퇴위하는 일왕 아키히토(明仁)는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에서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올바른 역사를 강조했다. 또 고노 요헤이 전 내각관방장관은 1993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최초로 인정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식민 지배와 침략을 공식 사죄했다. 1995년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식민 지배를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밖에 오부치 전 총리, 하토야마 전 총리를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자키 하야오,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 정치인과 문화예술인들도 양심적인 목소리를 냈다.
헌데 최근 한일관계는 이 보다 나쁠 수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 폐기에 이어 일제 강제 징용 배상 판결, 초계기 갈등이 겹치면서 최악이다. 위안부 합의 폐기에 대해 일본은 우리를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고 성토한다. 또 강제 징용 배상 판결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격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다. 아무리 미워도 같이할 수밖에 없다. 나쁜 이웃을 두었지만 운명이다. “일본과 관계가 좋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말은 함축적이다. 일본은 부품 소재 산업에서 절대적인 기술 우위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1등 제품일수록 대일 의존도는 높다. 휴대전화, LCD TV, 자동차 전장부품, 반도체 장비가 그렇다.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 이익을 공유해 왔다.
중국도 정성을 쏟고 있다. 5.4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일본을 자극하는 말을 피했다. 5.4운동은 항일정신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난징 대학살 추모식에서도 과격한 발언을 삼갔다. 난징 대학살은 일본군에 의해 민간인 20만 명이 숨졌다. 또 칭다오(靑島) 국제 관함식에는 욱일기를 단 일본 전함이 나타났다. 욱일기는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우리가 제주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기를 떼라고 요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은 거부한 채 끝내 참가하지 않았다. 장삿속 밝은 중국인들 속성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다. 그런데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지난 역사는 묻고, 작은 시비는 눈감는다. 비굴함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비롯된 계산된 행동이다.
한일 관계도 전환점을 가질 때다. 당장은 정치적 갈등에 머물고 있지만 민간영역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 때는 되돌리기 어렵다. 지난해 한일 관광객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에 간 한국인은 754만 명, 한국에 온 일본인은 295만 명이다.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1만 명)과 비교하면 1,000배 급증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국은 새로운 한일 파트너 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곧바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활발한 민간교류에 물꼬를 텄다. 양국 젊은이들이 주말이면 스스럼없이 가방을 챙겨 한국과 일본을 오가게 된 배경이다.
미움은 줄이고, 이해는 넓혀나가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다. 기성세대가 미래를 발목 잡아서는 안 된다. 감정에 매몰된 과잉 민족주의는 내려놓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가 열어 가도록 길을 열어줄 책임이 있다. 일본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아이는 어느덧 대학생이 됐고 이제는 일본에 친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