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인사이드]베트남 유교 문화의 상징, '하노이 문묘-국자감'

2019-04-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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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0년, 리 왕조시대 유교 처음 받아들여...'베트남 사회의 원기 역할'

진사비 82개 모여있는 하노이 문묘, 입시철 기도 장소로 여전한 '인기'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문묘-국자감 입구[사진=베트남통신사(TTXVN) 제공]

“유교는 국가의 원기(元氣)다. 왕성한 원기(유교)는 번영하는 국가의 세력이고, 쇠약한 원기는 비천하고 약한 국가의 세력이다. 때문에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해 국가의 원기를 육성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하노이 탕롱(Thăng Long) 문묘를 방문하면 이 같은 글귀가 쓰여있다. 이 글귀는 1484년 레탄똥(Lê Thánh Tông) 왕이 문묘에 기념비를 세우라는 지시에 턴년쭝(Thân Nhân Trung) 국가대신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 탕롱 문묘는 공자(Khổng Tử)를 모시는 사당이자 베트남 유교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베트남어로 문묘는 반미우(Văn Miếu) 또는 반탄미우(Văn Thánh Miếu)로 불린다.

베트남에서 유교는 지난 천년동안 학자, 학문을 배우는 계층들이 지식, 품행을 쌓고 단련하는 예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동양적인 군주제 아래 하노이 문묘와 국자감(태학)은 베트남 유교의 문화, 정신, 학문을 대변해왔다. 이는 오래 전부터 베트남이 동남아문화권이 아닌 동북아 문화권 반열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방증이다.

불교가 국교의 위치를 지키던 시기인 베트남 리(Lý) 왕조 시대. 리 탄 똥(Lý Thánh Tông) 왕은 처음으로 유교를 받아들이고 1070년 공자를 모시기 위한 문묘를 세웠다. 1076년 리(Lý) 왕조는 문묘 옆에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감도 설립했다. 애초부터 문묘-국자감은 유교 창시자를 모시기 위한 곳뿐만 아니라 국가, 왕조를 위한 인재 양성의 장소였다.

이후 문묘는 베트남 유교의 발전과 함께 중시되며 그 규모를 넓혀갔다. 쩐(Trần) 왕조 시대에는 국자감의 명칭을 국가학술연구기관(Quốc Học Viện)으로 변경하고 왕족 자제뿐만 아니라 평민 중 출중한 인물들까지 양성했다.

유교는 허우레(Hậu Lê) 왕조부터 응우옌(Nguyễn) 왕조(1802~1945)까지 베트남 전역에 영향을 끼쳤고 문묘는 수도뿐만 아니라 많은 성(tỉnh)에도 설립되기 시작했다. 응우옌 왕조 시대에는 후에(Huế)의 문묘 외에도 북부부터 남부까지 베트남 각 성(tỉnh)에 문묘를 세웠고 현(huyện)이나 더 작은 행정 구역에도 문묘를 설립했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하노이 문묘의 내부모습[사진=베트남통신사(TTXVN) 제공]

하노이 탕롱 문묘는 베트남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문묘다. 문묘와 국자감을 모두 합하면 5.5헥타르(약 5만5000㎡)에 가까운 면적이다. 베트남인들은 하노이 문묘가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베트남인의 노력과 지혜가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자부한다.

하노이 문묘의 건물들은 세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국의 산둥성(山東省) 취푸 문묘의 구도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탕롱 문묘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소박하고 간결한 베트남 전통 건축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탕롱 문묘 입구 쪽에는 반쯔엉(Văn Chương) 호수가 있고 가운데에는 낌쩌우(Kim Châu) 육지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경치 감상을 위해 낌쩌우 위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 건축을 살펴보면 겉에는 벽돌담이 둘러 쌓여있고 내부는 기능에 따라 5곳으로 나뉘어진다.

특히 이중 가장 중요한 장소는 레막(Lê Mạc) 왕조시대(1442~1779) 장원급제한 인물들의 82개 묘비가 놓여진 진사비(晉祠碑)와 공자를 모시는 곳이다. 탕롱 문묘는 국가특별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82개의 진사비는 유네스코가 2010년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82개의 진사비는 모두 거북의 등 위에 세웠다. 특이할 만한 점은 상단 비석을 지탱해 주는 하단 거북이 머리 모양이 머리를 바짝 들고 있으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사람이고 거북이 머리가 낮은 모양을 하고 있으면 가까스로 합격한 사람이라고 한다.

82개의 진사비가 이렇게 온전히 하나의 문묘에 모여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중국의 경우 지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수많은 유교사당이 소실됐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과거 국자감이었던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에 단 1개의 진사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최근에도 베트남 젊은이들은 입시철이나 매년 새해가 되면 공자를 모신 하노이 문묘를 찾는다. 이곳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인 국자감과 함께 1484년부터 지난 300년간의 과거급제자를 기록한 82개의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가 도열해있기 때문이다.
 

하노이 국자감 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가 도열해 있다.[사진=베트남통신사(TTXVN)]


리 왕조 시대의 국가대사인 턴년쭝에 따르면 베트남 유교의 긍극적인 목표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베트남 유교는 단지 현재(資才)를 양성하는 데 있다. 현재가 국가의 원기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유교는 현재를 배양해서 국사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이들을 선취하는데 최우선을 두고 있었다.

베트남은 공자사상의 의미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순수한 전통을 이어왔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본래 의미가 퇴색되며 사대부들에 의해 당파가 극심하게 나누어져 사화(士禍)로 점철된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없었다.

베트남은 처음 유교를 받아들이고 지난 1000년간 자신만의 유교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 계승해왔다. 오히려 일부 관점에서는 유교의 본류인 중국보다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점도 많다.

탕롱 문묘를 포함해 베트남의 유교 관련 문화재와 경전들은 이 같은 베트남만의 고유한 유교 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유교는 동양의 순수한 문화이자 이어나가야할 범아시아적 가치가 담겨있다. 베트남 유교에서는 본류보다 더 전통을 지켜나가며 전통을 이어나가는 그들만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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