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2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대학살의 신’은 탁구 경기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선수들은 ‘연기의 신’이다. 남경주(알랭 역) 최정원(아네뜨 역) 송일국(미셸 역) 이지하(베로니끄 역)가 2017년에 이어 같은 배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한다면 꼭 다시 하고 싶다.”는 배우들의 바람은 이뤄졌다. 연극을 보고 나니 왜 2년 전과 같은 캐스팅을 조건으로 꼽았는지 이해가 됐다.
‘대학살의 신’은 배우들의 호흡이 정말로 중요한 작품이다. 봅슬레이 4인승 경기처럼 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극의 퍼즐들을 촘촘하게 맞춰야 한다. 이지하는 “단 한 번도 공연이 같은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네 사람은 계속 도전 중이다. 최정원은 “얼마 전 우리의 호흡이 정말 잘 맞은 무대가 있었다. 공연을 마친 후 네 사람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다. 축구에서 도움을 하고 골을 넣은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두 번째인만큼 목표도 커졌다. 김태훈 연출은 “2년 전에는 나를 비롯해서 모든 배우들에게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캐릭터들이 일부러 의도하고 하는 행동들과 갑작스런 상황으로 튀어 나온 의도하지 않은 행동들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연극 ‘대학살의 신’은 지식인의 허상을 유쾌하고 통렬하게 꼬집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이다.‘대학살의 신’은 위선과 가식으로 뒤범벅된 인간의 민낯을 벗기는 작품이다.
부도덕한 제약회사의 편에 서는 변호사 알랭, 고상한 척 하지만 중압감에 못 이겨 남의 집 거실에 구토를 하는 아네뜨, 평화주의자로 보이지만 아홉 살 딸의 애완동물인 햄스터를 길거리에 몰래 내다버린 미셸, 아프리카의 모든 만행과 살육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꿈꾸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타인을 억누르고 조율하려 드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 베로니끄.
이들은 미묘한 신경전으로 시작해 육탄전까지 하며 가면을 모두 벗어던진다. 가해자 부부와 피해자 부부의 대립은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대결로까지 이어진다. 한 인물 안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들어있다. 관객들 역시 연극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위선과 마주하게 된다. 송일국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기 때문에 관객들마다 와 닿는 웃음 포인트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놀라운 호흡과 연기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남경주는 “지난번에는 감정적으로 했던 것을 이번 공연에서는 이성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털어놨다. 최정원은 “극중 나오는 파이가 정말 맛있는데, 공연이 시작하면 맛이 없다. 속이 울렁울렁 거린다. 구토하는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이 힘들었는데 세 분들이 잘 만들어주셨다”고 말했다. 이지하는 “연극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더 작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일 년 여 동안 프랑스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낸 후 ‘대학살의 신’을 연기하는 송일국은 “1년 동안 아내,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느낀 행복과 어려움 등이 무대에서 도움이 된다”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웃는 연기가 우는 연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네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극의 메시지도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전달됐다. ‘대학살’은 아프리카 유혈사태처럼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등 우리 삶의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이기심과 폭력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웃음과 교훈 모두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