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응답하라1988’은 가수 겸 배우 이혜리(24)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인지도는 물론이고 배우로서의 역량 또한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돌 출신에 대한 차별적 시선, 우려를 가장한 의심을 보기 좋게 걷어차고 덕선이 그 자체가 되었다.
하지만 ‘덕선=혜리’라는 공식은 그를 한계에 부딪치게 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꺼내 대중에게 보여주는 연기법을 택했던 그는 어떤 작품, 캐릭터를 만나도 ‘덕선이 같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혜리에게 지난 12일 개봉한 영화 ‘물괴’(감독 허종호)는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스크린 데뷔에 사극, 크리처물(주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등장하는 장르영화)이라는 낯선 장르로 덕선을 지우고자 한 것이다. 혜리의 영특한 시도는 적어도 반쯤은 성공했다. 극 중 수색대장 윤겸(김명민 분)의 딸이자 명사수 명 역을 맡은 그는 덕선과는 다른 또 다른 면면을 발견토록 했으니까.
영화 ‘물괴’는 어땠나? 스크린 속 모습을 자평해본다면
-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지금 찍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하하하. 아쉬운 마음이 크다. 솔직히 지금 찍어도 잘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크린을 보면서 ‘아, 저 부분이 저렇게 표현되는구나. 이렇게 연기해볼걸’하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봤다.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 대사 연습을 조금 더 할 걸…. 항상 첫 촬영에 많이 떤다. 영화 현장에서 가장 놀랐던 건 100여 명의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니 감동적이었다. ‘아, 나도 첫 촬영할 때 여유 있게 할걸’하는 생각도 들고. 인상 깊은 현장이었다.
첫 스크린 데뷔작이다. 그리 안전하지 않은 ‘액션, 사극, 크리처물’을 택했다
- 안전한 대본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물괴’ 시나리오가 더 흥미로웠다. 다른 시나리오들은 소설처럼 읽은 반면 ‘물괴’는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영상이 그려졌다. ‘명은 이렇겠다’, ‘활을 쏘는 모습은 이렇겠다’는 식으로. 거기다 액션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었는데 명이 활을 쏜다는 이야기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사극에 괴물까지 나온다니! 어떤 도전 의식이나 욕구를 끓어오르게 했다.
명 역이 혜리의 ‘액션 로망’을 채워주었을까?
- 채워주었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나 액션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미끼가 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나. ‘물괴’ 속 명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어떤 몫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더라. 작은 액션이라도 직접 해보고 싶었다.
액션을 막상 해보니 어떻던가?
- 어렵지 않았다. 워낙 체력이 좋아서 잘 견딜 수 있었다. 분량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 연기는 어땠나?
- 액션연기는 ‘지치지 않고 더 할 수 있어요!’였는데, 감정 연기는 그렇지 않았다. 어렵더라. 캐릭터와 저를 가깝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명이 감정신이 제일 많은 역할이지 않나. 혼자 해내야 하는 장면이 많아서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 고민들은 어떻게 해결했나?
- 감독님과 선배님들께 묻고 도움을 받았다. 영화가 좋았던 건, 촬영 전 감독님을 만날 시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명 역에 대해 설명하고, 감독님께도 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명의 감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감독님은 핑퐁 하듯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걸 좋아하시는 편이라서 의견 내기도, 받기도 좋았다.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 의견을 주고받는 것들이 굉장히 즐거웠던 모양이다
- 그랬다. 사실 가수는 강압적인 부분들이 있다. ‘이렇게 되었으니까 하도록 해’라는 식이다. 신인 때는 함부로 말도 꺼낼 수 없다. 초반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 답답함을 참아야 하기도 한다. 지금도 인스타그램 말고는 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매니저 오빠,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물어봐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긴 하지만…. 의견을 구하는 것이 좋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응답하라1988’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덕선이 넘어야 할 큰 산이라는 생각도 든다
- ‘응답하라1988’은 정말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아직도 많은 분이 덕선이 이야기를 한다. 덕선이도, 그린이도, 명이도 나인데. 이걸 숨겨야 하는 건가? 그런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선이를 떨쳐내야 보는 분들이 더 몰입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직 떨쳐냈다고 보기 어렵지만 계속 다른 방향과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명 캐릭터로 덕선을 지우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았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이었을까?
- 전사나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래도 현장에서 연기하다 보면 ‘이 말투는 덕선이 같나?’, ‘이 표정은 덕선이랑 비슷한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스스로를 가두는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이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로 이어질 것 같다
- 다행히 평소 스트레스는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덜 예민한 성격이라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잘 모르고 넘어간다.
자신에 대한 평가들은 찾아보는 편인가?
- 다 본다. 요즘에는 이름을 검색하면 댓글이며 트위터 반응까지 한꺼번에 올라오니까. 안 볼 수가 없다. 저도 핸드폰과 인터넷이 있다. 하하하. 좋을 때도 있고, 상처받을 때도 있다. 무뎌지지는 않지만 오기가 생겨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악플이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나 보다
- 그렇다. 게으르거나 나태해질 때도 있는데 그런 지적을 보면서 다시금 승부욕에 불탄다. ‘내가 다 울려주겠어!’하는 마음이 드는 거다. 그런 게 원동력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