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⑯] “중국 백만 대군도 못한 일…” 감격한 장개석, 한국독립 약속

2018-08-26 18:22
  • 글자크기 설정

상해의거, 광복의 물꼬 트다

[1932년 5월 9일 오후 홍구공원 사건의 진상을 담은 한 문건이 중국의 각 신문사로 배달되었다. 이 문건에는 윤봉길 의사 사진 한장과 상해의거 배후에 한인애국단 김구가 있음을 밝히고 한국의 독립이 완성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담겨있다. ]


거사 전모가 드러나다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새벽, 일본은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섰다. 일본총영사관 경찰 44명, 사복헌병 22명을 합하여 총 66명을 투입하고, 프랑스인 형사 12명, 중국인 형사 48명의 협력을 얻어서 철저한 수색전을 연일 벌였다. 이에 한국인의 피해를 줄이려고 김구는 윤봉길의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홍구공원 폭탄사건 진상’을 발표했다. 이로써 상해의거의 전모가 만천하에 밝혀졌다.

거사 목적과 사형 언도
‘홍구공원 폭탄사건 진상’ 발표로, 그간 수사를 교란시킨 윤봉길 의사는 말로 형언(形言)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구 선생이 체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윤봉길 의사는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다. 5월 11일 재판 때 그는 ‘김구 선생 발표를 인정하고, 그동안 진술한 내용 중 이춘산을 김구로 바꾸면 된다’고 사실을 밝혔다.
다음의 글은 헌병대 심문 때 윤봉길 의사가 밝힌 거사 목적이다. 이때 밝힌 윤 의사의 예견은 훗날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의 ‘통찰과 예지’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역사가 증명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투쟁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며,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모든 피식민지배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조락(自然凋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가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을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리는 없다. 따라서 금번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세계 사람들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는 개념을 이런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믿는다.”

한편, 일제는 5월 2일 군법회의에 회부된 윤봉길의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했다. 의거가 있은 지 불과 26일 후인 5월 25일, 윤봉길은 선고를 받기 위해 군사법정에 섰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재판장 판사 핫도리(服部曉太郞) 육군중령을 비롯해 재판관과 검찰관 모두가 일본군 장교들로 편성된 재판부에 의해 사형이 확정됐다. 형식적이며 졸속으로 진행된 재판은 단심으로 종결됐다.

혁혁한 성과
당시 각 신문에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로 일제 군 수뇌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는 기사와 함께 실제 피해사례가 연일 게재되었다.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내장이 쏟아져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고 다음날 새벽(4월30일) 사망했다.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온몸에 64곳이나 파편이 박혀,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눈에 파편이 박혀 실명했다. 제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왼쪽다리가 절단되는 상처를 입었고, 상해총영사인 무라이와 거류민단서기장인 토모노도 중상을 입었다. 한편, 윤봉길 의사의 가장 큰 표적인 상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은 폭탄을 맞은 지 27일 만인 5월 26일 사망했다. 일본은 일왕까지 나서 그에게 남작 작위와 어주(御酒)까지 내리고 욱일훈장까지 주는 등 쾌유를 빌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상해의거 이후 피난길에 나선 임시정부의 목선. 이 목선은 1937년 7월 식솔 300여명을 태우고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이동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윤봉길 의사는 상해의거로 인해 당시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조국 광복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영웅으로 우뚝 섰다. 상해의거로 인해, 당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임시정부가 부활, 활성화됨으로 그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를 존재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악화된 한중 양 민족의 증오관계를 해소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다시 할 수 있게 되고,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중국인에게는 항일의식을 고조시키고, 한중 공동 항일전선의 터전을 마련했다.
 

[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빈관에서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지청천 한국광복군총사령관(왼쪽 둘째), 김구 임시정부 주석(왼쪽 셋째), 유치(劉峙) 중국 국민당 장군(왼쪽 넷째)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무엇보다도 일제의 상해사변 승전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켰다. 이에 일제는 확전을 단념하고, 5월 5일 중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일제의 문화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국내 한민족의 의식을 크게 일깨우고, 국내외 조국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매우 완강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 한국인의 존재와 독립의지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조국 광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독립운동가 정화암의 회고
‘남화한인연맹’을 이끈 정화암(鄭華岩) 선생은 “…(중략)…우선 내가 명백히 지적해 두는 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으면 임정이라는 것은 거기서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나마 들어오던 돈도 딱 끊어졌고, 중국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중략)…이러다가 윤봉길 의거가 있게 되어 임정이 살아납니다. 중국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되고, 또 해방과 더불어 귀국할 때도 그래도 임정을 앞세워 떳떳하게 나서게 되는 것도 모두 윤봉길 의사의 피 하나의 결과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
“윤 의사 의거는 중국 관민에게 한민족의 열렬한 애국혼과 한인의 독립운동이 엄연히 상존(尙存)해 있음을 인식시켰고, 세계도 또한 한국 독립의 난문제(難問題)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조국이 광복된 데에는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그 원인을 찾아볼 때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대의거를 일으킨 때문에 중국정부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해 주었으며, 마침내 장개석 총통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한 때문이다.”
 

[장개석 중국 국민당 주석. 상해의거 소식을 전해 들은 장 주석은 “중국의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중국 정부는 이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

장개석 총통의 평가
윤봉길 의사 의거는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크게 감동을 했다. 이에 장 총통은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며, 임정을 사실상 인정했다. 게다가 윤의사 장거에 크게 감동한 총통은 1943년 11월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독립 확약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세계2차대전 종전즉시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

중국 공산당의 평가
상해사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 인민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준 윤봉길의 장거(壯擧)에 열광하며 추앙했다. 이에 1936년 중국공산당이 파리에서 발행한 <구국시보(救國時報)> 1월 29일자 신문에 윤봉길 의사를 ‘상해보위전의 순국열사’ 명단에 수록했다. 이는 윤 의사를 자신들의 민족영웅으로 숭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해 3월 5일자 신문에 ‘윤봉길 열사는 비록 숨을 거뒀지만, 우리 혁명에 대한 열사의 업적은 영원하리라. 열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했지만, 열사의 정신은 우리당 동지들을 격려해 주었으며 용맹하게 전진하라는 메시지였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한편 1989년 10월 ‘상해시위당사자료정집위원회’에서 발행한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봉길 의사만 혁명가로 올라갔다.

상해의거, 탁월한 통찰력이 이뤄낸 쾌거
상해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국제정세를 보는 탁월한 통찰력’과 ‘조국 독립의 확신’이 거둔 쾌거로 의도된 거사였다. 그가 헌병대 심문에서 밝힌 것처럼, 상해의거 후 7년이 지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또 13년 뒤인 1945년, 일본은 패망하고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기미가요’를 중지시킨 홍구공원의 폭탄소리는 일제패망의 전주곡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상해의거 때, 한쪽다리를 잃은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의 주역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후일 외무대신이 된 그는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 올라,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윤봉길 의사의 예견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