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이나 지속돼 왔던 은산분리 규제에 직접 손을 대는 등 정부가 금융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지 보신주의와 규제일변도의 정책이 국내 금융시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이 은산분리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세계 각국의 인터넷전문은행은 1990년대 초반 시행착오를 겪고 과도기를 넘어 수익모델을 정착시키고 있다.<관련기사 3면>
출범 초기에 미국 인터넷전문은행은 고객 기반이 취약해 파산한 은행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차근차근 노하우를 쌓아 2004~2005년을 기점으로 상위 10개 인터넷은행은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일본도 2000년부터 인터넷전문은행을 육성하기 시작해 2005년 상위 4개 은행이 흑자로 전환했다.
중국은 마이뱅크(알리바바 지분 30%)와 위뱅크(텐센트 지분 30%) 성공사례에 힘입어 미국을 제치고 100억 달러(약 11조1000억원) 규모의 최대 핀테크 투자 시장이 됐다.
중국의 핀테크 도입률은 지난해 말 기준 69%로 집계됐다. 핀테크가 활성화된 세계 20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한국은 32%로 12위에 그쳤다.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아침 식사를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면서 중국의 핀테크 기술을 극찬했다. 최근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은산분리 완화를 촉구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은산분리 완화 반대론자였던 윤석헌 금융감독원장까지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면서, 금융 시장의 규제완화는 급물살을 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금융개혁을 원하는 청와대의 ‘혁신’ 주문에 금융위원회는 핀테크 산업에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응답했다.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하는 제도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금융혁신지원특별법에는 금융분야의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금융위는 ‘혁신성’과 ‘소비자편익’이 높은 금융서비스를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하고, 금융업 인·허가 없이도 일정 범위 내에서 영업할 수 있는 규제특례가 허용된다.
하지만 적극적인 정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한 핀테크 업체 대표는 “막상 해보려고 나서면 당국에서는 ‘그쪽은 이래서 안 되고 저쪽은 저래서 안 된다’고 울타리를 친다”며 “샌드박스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뭘 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사고가 터질 수 있는 부분을 정밀하게 진단해 ‘핀셋 규제’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진단도 않고 무조건 빨간 약만 바르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중국은 핀테크 산업의 성장 촉진을 위해 사후적 규제, 네거티브 규제 방식도 적용하고 있다. 네거티브 규제는 안 되는 것 빼고는 다 해도 되는 열린 규제 방식이다. 국내에서 적용되는 포지티브 규제와는 정반대되는 정책이다.
오정근 한국금융 ICT 융합학회장은 “노무현 정부가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도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핀테크 분야에 대해 과감하게 규제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