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자기만족(complacency)이 지나치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글로벌 무역전쟁, 중국의 경기냉각 조짐을 비롯한 대형 악재를 과소평가하는 데 따른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시장의 자만심은 미국에서 가장 뚜렷하지만, 다른 주요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뉴욕증시의 S&P500지수와 다우지수는 지난 6일 이후 하루만 빼고 줄곧 올랐다. 6일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340억 달러어치의 상대방 제품에 폭탄관세를 물리며 전면적인 무역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날이다.
채권시장도 잠잠하다. 미국 국채시장의 변동성 전망을 나타내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지표는 사상 최저 수준에 가깝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현지시간) 일련의 증시 흐름이 자기만족 공포를 촉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특히 미국 증시의 랠리가 투자자들이 경기침체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인공지능(AI) 시장 분석업체인 지오퀀트의 마크 로젠버그 최고경영자(CEO)는 "시장이 무역분쟁을 깔보는 것 같다"며 "정치위험 관점에서 이는 오산으로 보다 실질적인 피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WSJ는 무역전쟁으로 국제 무역이 둔화하거나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와 기업의 씀씀이가 줄게 된다고 설명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BofAML)는 수입품 가격이 10% 뛰면, 기업들의 해외 매출이 줄어 핵심 실적지표인 주당순이익(EPS) 성장세가 3~4% 둔화할 것으로 분석했다. 실적이 나빠지면 주가 하락이 불가피하다.
블룸버그도 이날 시장의 자기만족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대로 중국산 제품 2000억 달러어치에 추가로 폭탄관세를 물리면, 미국 증시가 10~15%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스티븐 메이저 HSBC 채권 리서치 부문 글로벌 책임자는 위험자산이 '슬로모션(slow motion) 신용경색'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역전쟁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금리인상, 에너지 가격 상승이 맞물려 자산시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블룸버그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을 둘러싼 우려가 미국 국채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수익률 곡선 평탄화를 가속화했다고 지적했다.
수익률 곡선은 단기 채권과 장기 채권의 금리(수익률) 차이(스프레드)를 반영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2년 만기 국채와 10년 만기 국채의 스프레드를 의미한다. 보통 단기 채권은 장기 채권에 비해 투자 위험이 낮아 금리도 낮은 게 보통이다. 경기침체를 비롯한 위험이 임박하면 단기 채권 금리가 올라 스프레드가 좁아진다. 수익률 곡선이 평평해지는 셈이다.
이날 현재 미국 국채 2년물과 10년물의 스프레드는 25bp(0.25% 포인트)에 불과하다. 미국이 경기침체에 빠진 2007년 이후 가장 낮다.
닐 카시카리 미국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이날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평평해진 수익률 곡선을 문제 삼으며, 금리인상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준이 계속 금리를 올리면, 수익률 곡선이 역전되는 것은 물론 경제에 브레이크를 걸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장 전문가와 투자자들 사이에서 수익률 곡선이 빠르면 올해 말 역전을 이룰 것이라는 관측이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경기를 둘러싼 우려도 커졌다. 블룸버그는 무역전쟁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경기냉각 조짐이 지표로 확인됐다며, 이는 세계 경제에도 나쁜 징조라고 지적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이 이날 발표한 2분기 성장률은 6.7%(전년 동기 대비)다. 예상치에 부합했지만 전분기보다 0.1% 포인트 하락했다. 2016년 이후 최저치다. 투자, 산업생산 등 하부 지표도 지난달에 전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미국이 중국산 제품 2500억 달러어치에 폭탄관세를 물리면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중국의 성장률이 0.6%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마이클 에브리 라보뱅크 홍콩 주재 금융시장 리서치 책임자는 "무역전쟁이 악화일로"라며 "이는 중국에 악재이자 우리 모두에게 악재"라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중국이 세계 경제 성장세의 3분의1을 책임지고 있다며, 중국의 경기냉각은 수년 만에 가장 돋보이는 성장세를 뽐내온 세계 경제에 정체 신호를 하나 더 보탠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