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생보사는 나 씨가 가입한 B생보사 보험을 정확히 언급하며 이를 해지하고 이보다 더 좋은 자사의 상품에 가입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B생보사 역시 나 씨가 가입한 A생보사 상품보다 더 좋다며 자사 상품을 권유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오후에는 C손보사에서 전화가 온다. 나 씨가 D손보사에 가입한 실손 보험을 해약하고 더 좋은 자사의 상품에 가입하라는 전화다.
A~D보험사 모두 경쟁사 상품을 해약하고 자사의 상품에 나 씨를 가입시키기 위해 치열한 영업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각 보험사에서 나 씨가 가입한 경쟁사 상품을 분석해 이를 저격하는 신상품도 개발됐다.
조만간 고객이 어떤 보험에 가입했는지 보험사가 수집해서 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대부분 보험사가 고객이 다른 보험사 상품에 가입했는지, 상세한 보장 수준은 어떤지 모든 정보를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다.
1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KB손보는 지난달 스크래핑 기술을 활용한 IT 시스템을 출시했다. 그 외 다른 대형 보험사도 이와 유사한 IT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이들 보험사는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 자사 고객이 다른 어떤 보험에 가입했는지 파악하고 이를 DB(데이터베이스)화 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는 최근 보험관리 플랫폼·사이트의 서비스를 이용한 방식이다. 최근 서비스되고 있는 레몬클립, 굿초보 등 보험관리 플랫폼·사이트에 가입하고 정보활용 절차에 동의하면 '스크래핑(Scraping)' 기술을 활용해 해당 고객이 어떤 보험에 가입했는지 전부 찾아준다.
스크래핑은 인터넷 스크린에 보이는 데이터 중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고 가공하는 기술이다. 과거에는 고객 본인이 가입한 보험에 확인하기 위해서 일일이 생명·손해보험협회 등에 검색해봐야 했다.
그러나 스크래핑 기술을 활용하면 IT 시스템이 이 같은 검색을 대신 해줘, 고객이 필요한 정보를 알아서 모아준다. 현재 보험사들이 만들고 있는 IT 시스템도 이 스크래핑 기술을 활용해 고객의 정보를 모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즉 보험사가 고객의 다른 보험사에 가입한 내역도 모두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보험관리 플랫폼·사이트와 달리 보험사는 이 정보를 영업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현재 보험관리 플랫폼·사이트는 대부분 고객의 보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고 최저가 상품을 찾아주는 등 코치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보험사는 다른 보험사 상품 정보를 이용해 상품을 개발하거나 고객을 뺏어오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보험사에서도 동일한 IT 시스템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자사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빼앗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맞불을 놓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대부분 보험사가 서로서로 고객 정보를 DB에 쌓아두고 이를 분석해 이익을 얻으려 하는 상황이 된다.
IT 업계에서는 개별 보험사들이 보험업권의 '빅브라더'가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자를 뜻한다.
개별 보험사도 고객의 모든 보험활동 정보를 빠짐없이 얻게 되면 이를 활용해 이익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높고, 아예 빅브라더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험 시장을 통제하려 할 수 있다는 의미다.
IT 업계 관계자는 "보험사가 고객이 다른 보험사 어떤 보험에 가입했고 어떤 보장을 받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이라며 "보험사가 이런 정보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