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BOJ)이 이른바 '료테키긴유간와(양적금융완화)'에 처음 나선 건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누린 역대 최대 호황이 저물고 1990년대 들어 자산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장기불황,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으로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경기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기준금리를 낮추는 게 중앙은행의 급선무다. 하지만 당시 BOJ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1999년부터 기준금리가 사실상 '제로(0)'였기 때문이다. BOJ가 고육지책으로 꺼내든 카드가 바로 '료테키긴유간와'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극약처방이었다.
주목할 건 연준, BOE, ECB가 이미 양적완화 축소·중단, 금리인상 등 통화긴축 모드로 돌아서고 있는 데 반해 BOJ는 기존 통화부양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BOJ는 양적완화는 물론 2016년 처음 도입한 마이너스(-) 금리 기조도 고수하고 있다. 다른 중앙은행들과 달리 경기 전망을 낙관할 수 없어서다.
◆극약처방도 안 통하는 디플레이션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취임 후 처음 주재한 2013년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이른바 '2차원 금융완화' 방침을 천명한다.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대 공약으로 내건 '디플레이션 탈출'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인플레이션의 대척점에 있는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장기불황을 부채질한다. 얼마 뒤 가격이 내릴 것 같으면 굳이 오늘 소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구로다 총재는 당시 한참 동안 마이너스 영역에 있던 물가상승률을 2년 안에 정책 목표치인 2%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양적·질적 금융완화, 이른바 2차원 금융완화의 효과를 확신했다. 2차원 금융완화는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제한했던 자산매입 대상을 확대해 시중에 더 많은 돈을 푸는 방식이다.
2차원 금융완화는 얼마간 효과를 보는 듯했다. 엔화 값이 급락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고, 덕분에 일본 경제와 증시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 2월 전년동기 대비 1.5%나 뛰자, 곳곳에서 디플레이션 탈출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BOJ가 통화부양 기조에서 곧 발을 뺄 것이라는 전망도 뒤따랐다.
◆반짝 오른 물가상승률 다시 내리막
그러나 일본의 CPI 상승률은 4월부터 곤두박질쳤다. 3월 1.1%, 4월에는 0.6%까지 떨어지더니, 5월에도 0.7%에 그쳤다. BOJ가 이달 말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올해와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하향조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1일 BOJ가 이번 회의에서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지난 4월 제시한 1.3%에서 1.0% 정도로 낮추고, 내년치는 1.8%에서 1% 중반대로 하향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일본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목표치인 2%에서 다시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로, BOJ가 통화완화 기조를 유지할 공산이 커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BOJ는 그동안 고용 및 기업수익 회복에 따라 물가상승이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했다. 구로다 총재는 추가 통화완화 조치를 단행하거나 기존 통화완화 정책을 오래 쓰는 데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기도 했다. 최근 인플레이션 지표로 보면 쓸데없는 걱정을 한 셈이다.
BOJ의 후퇴는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구로다 총재는 이미 물가상승률 2% 달성 시한을 6차례나 미뤘다. 급기야 지난 4월 회의에서는 '2019년쯤'으로 돼 있던 시한을 아예 삭제했다.
◆역대급 고용호황에도 임금 제자리
일본 경제가 역대급 호황에도 디플레이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베 총리가 취임 초부터 재계를 상대로 보여준 광폭 행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임금이 도통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대기업 경영자들과 잦은 회식, 골프 등을 통해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그가 민간 부문에 대한 정부 개입을 둘러싼 비판을 감수하고 나선 건 임금인상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는 기업들이 의미 있는 수준의 임금인상을 단행하지 않는 한 소비 증가에 따른 경제 선순환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고용시장은 일자리가 남아돌 정도로 호황이다. 실업률은 2.2%(5월 기준)로 25년 7개월 만에 가장 낮고, 유효구인배율은 1.6배로 44년 4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구직자 1명당 1.6개의 일자리가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임금은 도통 오르지 않았다. 일본의 임금상승률은 지난 3월 10여년 만에 처음 전년동기 대비 2%까지 올랐지만 4월에는 0.8%로 곤두박질쳤다. 전문가들은 임금상승률이 낮아진 게 아니라 3월에 이례적으로 높았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는 가까운 미래에 일본에서 소비가 대폭 늘기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고 입을 모았다.
◆구로다 "임금상승률 3%는 돼야"
구로다 총재는 지난달 말 물가상승률을 2%까지 높이려면, 임금상승률이 3%는 돼야 한다고 밝혔다. 마르셀 티엘리언트 캐피털이코노믹스 선임 일본 이코노미스트는 최신 보고서에서 이보다 낮은 수치(2.5%)를 제시했지만, 이 역시 만만한 목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임금상승률을 2.5%로 높이려면 실업률이 1.5%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봤다. BOJ의 통화긴축 행보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일본에서 구조적인 문제들이 임금상승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임금·비정규직 증가, 임금인상보다 일자리 안정, 일하는 방식 개혁을 더 강조하는 노조, 근로시간 단축, 낮은 생산성 등 단기간에 손대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