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CVID 네 글자 보다 진정성이 중요하다

2018-06-1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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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시한(時限)과 세밀한 시행계획이 빠진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진보 언론으로부터 난타를 당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저 코헨은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돌아와 “북한의 핵 위협은 끝났다. 오늘 밤 편히 주무시라”고 트윗을 날린 것을 두고 1938년 영국 네빌 체임벌린 총리에 비유했다.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체임벌린이 “우리 시대에 평화가 도래했다. 집에 가서 편히 자라”고 말한 것과 어찌 그렇게 닮았냐는 것이다. 1년후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미국의 신문방송만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트럼프의 당선에 화들짝 놀랐듯이 싱가포르 정상회담도 반(反) 트럼프 성향의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만 보다가는 똑같은 예측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거래의 달인이라는 트럼프가 1994년 제네바 합의만도 못한 달랑 네 줄 짜리 공동선언을 발표해 놓고 왜 그렇게 자신감을 드러내냐는 것이다. “화염과 분노” “더 큰 핵 단추”를 언급하며 북한을 공공연하게 위협하던 트럼프는 물론이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모두 강성 매파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은 북한이 이번엔 다르다는 확신을 넘어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는 듯하다.
폼페이오 장관은 “모든 작업이 최종 문안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글로 옮길 수는 없었다”며 그러한 이해가 출발점이 돼서 북한의 핵 시설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 다음주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분명하게 트럼프의 남은 임기 2년 반 안에 중대한 비핵화가 성사되기를 희망한다고 시한을 못 박았다.

오랜 세월 불신이 켜켜이 쌓인 북·미관계에서 다른 무엇보다 진정성이 매우 중요하다. 김일성이 죽던 해에 체결된 제네바 핵 합의는 북한이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철저한 기만극으로 판명 났다. 김정일이 협상에 나가는 외무성 관리들에게 내린 지침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을 벌어라”였다. 처음부터 합의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고 태영호는 증언한다.

그러나 이번에 김정은은 싱가포르에 와서 통역만 배석시키고 트럼프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트럼프는 자신만만하고 노련한 비즈니스맨 같은 인상을 주는데 김정은은 트럼프와 악수를 할 때도 얼굴에서 긴장을 풀지 못했다. 과거의 북·미협상에 비추어 공동성명의 부동(不動)문자도 북한이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데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지난 과거를 털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문건에 서명하게 된다”는 김정은의 말에 실린 무게를 문자로 된 합의보다 가볍게 볼 수 만은 없다고 본다.

북·미회담을 성사시킨 막후 채널로 트럼프의 맏딸 이방카의 남편인 재러드 쿠슈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북한은 미국 국무성의 관료 장벽을 우회하기 위해서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미국인 사업가 가브리엘 슐즈와 접촉해 쿠슈너와의 채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사이가 나쁜 쿠슈너가 폼페이오 CIA 국장과 평양의 접촉을 주선했다고 한다. 폼페이오와 김영철의 북·미 상호 방문과 양국 수뇌 접촉을 통해 미국은 북한의 진정성을 믿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4년 전 제네바 합의만도 못한 성명이라고 일축하기 전에 앞으로 몇 달 동안 진행될 북·미간의 접촉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미 간의 군사훈련처럼 돈이 많이 드는 워 게임일랑 그만 두고 주한미군 철수도 고려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이 불안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협상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무릎 꿇리는 게임이 아니다. 미국도 북한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뭔가를 내놓아야만 협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북한의 행동을 보아가며 한·미 군사훈련은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한국이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빼내겠다고 겁을 주었다. 그는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지만 한국으로부터 주둔비용을 더 받아내기 위한 장사꾼적 계산이라고 본다.

김정은이 미국을 방문할 즈음에는 그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는 구체적인 조치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김정은에게 의전(儀典)과 관련해 한가지 충고를 하자면 그 칙칙한 인민복을 벗어 던지고 양복 정장을 입고 미국에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국가를 보여주기 위한 다른 어떤 시도보다도 효과적이다. 과잉 비만을 감추는데도 염색한 밀가루 부대같은 인민복보다 양복정장이 나을 수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쳐 장쩌민 때부터 인민복을 입지 않는다.

​‘리틀 로켓맨’에서 1년도 안 돼 ‘똑똑한 지도자’로 바뀐 트럼프의 김정은관(觀)을 일일이 걸고 넘어지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북한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도 따져야 하겠지만 당장은 비핵화가 먼저다. 광포한 소년이 칼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는 칼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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