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리뷰]'백년의 약속', 한국 임시정부를 예술의전당에 세우다

2018-06-07 16:15
  • 글자크기 설정

좌우 진영 예술가의 '오페라통일'...우린 이제 문화적 독립운동이 필요하다

['백년의 약속' 공연의 한 장면]



#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 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전투복을 입은 육군사관학교 합창단과 군악대 110여명은 '압록강 행진곡'을 힘차게 연주하고 부르며 인상적인 군무를 펼쳐보였다. 2018년 6월1일. 임시정부 100주년을 한 해 앞둔 해에, 이런 장면을 예술의 전당에서 보는 감회는 특별했다.

압록강 행진곡은 1943년 광복군이었던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곡을 붙인, 힘찬 군가다. 임시정부의 군인들이 부른 노래를 75년 뒤 대한민국의 군인들이 광복군의 비장한 심경으로 되짚어 불렀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라고 외칠 때 객석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따라부르기도 했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서서, 광복군의 위상을 오늘 대한민국 군의 위상으로 병치시키는, 힘있는 상징이었다.
 

['백년의 약속'공연의 한 장면.]



# 100년의 시간여행은, '현재적 충격'을 키웠다

1일과 2일, 주말에 펼쳐진 음악회 '백년의 약속'(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주최)은, 80분간의 콘서트와 80분간의 오페라로 구성된 독특한 무대였다. '압록강 행진곡'은 1부 콘서트에서 큰 울림을 줬던 공연이었다.

우리는 일제 치하 독립투쟁을 드라마나 영화, 책 속에만 있는 일들로 읽기 쉽다. 그것을 굳이 꺼내는 일이 필요한가 하는 회의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지금 여기 달라진 세상에서, 그때 거기 앞이 안보이는 최악의 절망상황에서 이 나라 이 겨레의 자주독립을 외치는 이들의 마음과 같은 '결'로, 감정이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歷史)라는 말은, 우리를 만든 조상이 때로는 피와 눈물을 밟고 지나온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존재를 결정하는 심각한 순간이 불과 100년전엔 현실이었다는 인식이 바로 역사의식이다. 그때의 판단과 결정과 행동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달라지게 했나를 느끼는 것이, 역사를 통해 진화를 거듭해온 인간 지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이 음악회는, 100년을 돌아보고 향후 100년을 생각하게 하는 진지한 시간여행이다. 역사가 문화 위에 얹힐 때 생겨나는 '현재적 충격'이야 말로 가치있는 체험인 셈이다.

# 체코, 헝가리, 러시아, 프랑스에 감사함

그 현재적 충격을 줬던, 대표적인 지점을 나름으로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1부 콘서트에 등장한 4개의 외국곡이다. 맨처음 등장한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은 체코에 대한 감사를 담은 기획이었다. 체코는 청산리 대첩 때 무기를 제공해준 나라다. 당시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진출해 있었다.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는 지금도 한국의 금비녀, 금반지, 비단보자기나 놋요강이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 무기를 거래하며 독립군들이 건넸을, 우리 국민들의 눈물겨운 물건들로 짐작된다. 스메타나의 애국혼이 스며있는 '나의 조국'은, 그래서 우리에겐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다음은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2번이었다. 미국 줄리어드 음대와 뉴욕주립대에서 피아노과 석박사 학위를 받은 피아니스트 백명진(서울신학대 교수)의 눈부신 연주가 돋보였다. 이 곡이 등장한 까닭은 1920년대초 의열단장 김원봉의 활약상에 감동한 헝가리인 마자르가 의열단의 폭탄제조를 도왔던 일을 기리기 위해서다. 김원봉에겐 또다른 헝가리 스토리가 있다. 그가 박차정 여사에게 청혼하며 인용했다는 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는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세번째는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싱어 김규민과 래퍼들이 어울려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러시아에 대한 감사를 담았다. 초기 독립운동 때 러시아는 투사들이 활동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극한의 고난과 궁핍 속에서 '희망의 배반'에 몸부림치며 낯선 이국땅에서 투쟁을 이어갔을 우리의 독립운동가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다.

마지막은 육사 합창단과 군악대가 부른 샤를 구노의 '병사들의 합창'이다. 구노는 프랑스 오페라의 거장으로 우리에겐 '아베마리아'나 '파우스트'로 익숙해져 있는 음악가다. 그의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프랑스 조계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프랑스의 이런 배려가 없었다면, 임시정부의 출범은 한층 더 힘겨웠을 것이다. 콘서트의 중간중간마다 꼼꼼히 배치한 4개 국가의 음악과 시는, 우리의 독립을 응원해주고 도와준 참된 우방을 함께 기억하며 이 땅의 투쟁이 인류 보편의 정의에 기반한 것임을 다시 느끼게 하는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 팝핀현준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둘째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 어우러진 팝핀현준의 참신하고 설득력있는 안무였다. 1926년 이상화가 일제에 짓눌린 조국에 대한 애정을 담아 표현한 시로,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시작하여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로 끝나는 저항적 절규이다. 동시대의 감수성을 춤으로 풀어내는 팝핀현준은 조국을 상실한 자의 방황과 혼란을, 꺾어지고 흐르는 동작들 속에 아로새겼다. 안무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 큰 박수가 쏟아졌던 것 또한 이런 공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셋째, 이 공연에서 가장 기대를 모았던 것은 오페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였다. 이 작품은 독립투사 음악가 한유한(1910-1995)과 정율성(1914-1976)의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각색 편곡한 것이다. 한유한의 작품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아리랑'이며, 정율성의 작품은 오페라 '망부운(望夫雲)'이다. 두 사람의 작품을 합친 까닭은, 그들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좌우 진영을 대표하는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좌우가 사상이나 방법론은 달랐다 할지라도 조국 독립에 대한 이상과 염원은 같았다는 점을, 이 통합 오페라 속에 상징적으로 녹여넣은 셈이다.
 

[백년의 약속]




# 좌우 진영의 대표음악가의 '오페라통일'

오페라는 경술국치에서 3.1운동과 독립투쟁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조국애와 사랑의 스토리를 펼친다. 식민지의 암울함 속에서 '반전(反轉)'없는 억압과 투쟁을 묘사해나가다 보니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단조롭지만 뒤에 배경으로 펼쳐지는 역사 다큐영상이 긴박한 호흡을 만들어준다.

이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페라 중간중간에도 관객들의 호응이 터져나왔던 점이었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때, 관객들은 객석에서 같이 만세를 부르며 서로 하나의 흐름을 탔다. 어쩌면 오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내재된 기억들을 끌어내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 같았다.

일제에 폭압에 찢어져 어디론가 흩어진 뒤, 서로를 그리워했던 찬수와 아랑이 마침내 극적 해후를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뒤 "대한독립 위해서 하늘에서도 싸우리"라고 노래하며 죽어갈 때 객석에는 조용한 오열이 일었다.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나 이뤄지고,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2018년 6월에 서울의 한 무대에서 이뤄진 '오페라 통일'은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비원(悲願)을 담고 있었지만 일심동체의 절절함만은 오랜 여운을 남겼던 것 같다.

320명이 함께 한 이 공연은, 너무 짧은 기간에 준비를 하다 보니 서로 호흡을 맞출 시간이 많지 않았던 듯 하다. 공연 중에도 그런 '옥에 티'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출연자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한 무대였던 만큼 임시정부라는 중대한 역사적 주제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고 전달하고 싶은 열정은 딴 공연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공연이 끝난 뒤 나올 때 무엇보다 가슴 속에 꽉 차올랐던 것은, 그간 자꾸 왜소해져만 왔던 공동체적 가치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생각도 함께.

이날 무대도 볼 만했지만 객석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의식을 가진다는 건, 지적 성찰의 깊이를 말한다는 것을 관람객의 면면을 보면서 다시 느꼈다. 공연을 보면서 가슴에 담아갔을 느낌표들 또한 이 음악회의 파장(波長)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분들을 메모해놓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첫날(6월1일) 객석에 계셨던 분들:  피우진 보훈처장 , 안대희 전 대법관, 김영세 우남케미칼해운회장, 이만열 숙대 명예교수, 서홍관 국립암센터 박사, 유희인 국민안전처 차관, 이봉서 단안산업 회장, 김호남 근화건설 회장, 김윤형 한국선진화포럼 부회장, 이진 웅진그룹 부회장, 장명국 내일신문사장, 조선희 작가, 한갑수 전 농림부장관

이튿날(6월2일) 객석에 계셨던 분들: 이종걸 국회의원,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김형오 전 국회의장 ,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윤형섭 전 교육부장관, 이기흥 서울예술대 이사장, 정세균 전 국회의장, 한시준 단국대교수, 허성관 전 행자부장관

'백년의 약속'은 오는 18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무대를 이어간다. 이 무대를 입안한 김선현 오토회장(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은 지난 1일 공연이 끝난 뒤 "오는 8월 임시정부 영화제와 11월 문학제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내년 임정 100주년의 뜻깊은 한해를, 우리의 국가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역사적 전환기로 삼고 싶다"는 포부를 보였다.

* 아주경제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의 공연의 취지와 의욕에 깊이 공명(共鳴)하고, 그 뜻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본사는 내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모멘텀으로 한국의 역사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어젠다 세팅의 일환으로, 올들어 '여성독립투사 시리즈'를 연중기획으로 실어왔습니다. 미디어는 '가치'산업이며, 과거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미래의 가치를 창의적이고 유연하게 확장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