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북·미 정상회담 의제 조율을 위해 27일부터 판문점에서 열리는 실무회담에 나선 성 김 주(駐)필리핀 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측 성 김 대사는 북·미 실무회담의 팀장 역할을 맡고 있다. 김 대사는 오바마 정부에서 6자 회담 미국 수석대표와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거쳤다. 미국 내 손꼽히는 대북 협상가이자, 한반도 전문가라는 평가다.
외교가에서는 지난 18일을 전후해 김 대사가 북·미 정상회담 준비 실무단 대표로 합류하는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된 중책을 맡아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설(說)이 전해졌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 대사는 1970년대 중반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뒤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로욜라 로스쿨과 런던정경대(LSE)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검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88년 외교관으로 이직한 뒤 주한 미대사관 정무참사관(2002~2006년)과 국무부 한국과장(2006~2008년)을 거쳐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6자회담 특사로 발탁됐다.
김 대사는 2008년 6월 미국 쪽 대표로 북한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2011년 11월부터 3년간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김 대사는 2014년 10월부터 2년간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겸 한·일 담당 동아태 부차관보직을 맡았다.
2016년 11월 김 대사가 주 필리핀 대사로 부임할 당시, 존 케리 당시 미 국무장관은 "(김 대사는) 합리적 판단과 열심히 일하는 자세, 뛰어난 지능, 겸손함으로 명성을 얻었다"며 "특히 김 대사가 외교가의 '조지 클루니'라고 불리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겸손함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김 대사가 대북정책 특별대표 자격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12차례나 방북했다는 사실이 케리 전 장관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김 대사와 함께 판문점 협상에 나선 북측의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김정은 체제에서 대표적 대미 협상 창구로 북한 외무성 내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힌다.
특히 지난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의 전격적 취소를 결정하면서 이유를 들었던 것도 최 부상의 발언이다.
1980년대 중반께 외무성 근무를 시작했다고 알려진 최 부상은 6자 회담 등 주요한 북·미 협상에서 북쪽 수석대표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중국 등 해외 전역에서 공부하며 영어를 최고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부상은 이런 이력으로 외무성에서 통역 및 외국어를 담당하며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후 김정은 위원장의 영어 통역을 담당하며 최측근으로 자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외무성 북아메리카국에서 긍정적 성과를 보이며 승승장구했고, 최근까지 북아메리카 국장으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북아메리카 국장으로 발탁된 그는 북한 내 금수저로 불린다. 북한 권력서열 3위로 내각 총리를 지냈던 최영림의 수양딸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1930년 함경북도 경흥 출신인 최영림은 김일성이 독재시스템을 공고히 하던 초기, 책임부관으로 10여년간 복무했다.
그러나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자, 최 부상을 포함해 한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을 입양했다.
1980년대부터 북한 외무성에 근무한 최 부상은 2003년 8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열린 6자회담에서 북측 수석대표 통역을 맡으며 얼굴을 알렸다.
김 대사와 최 부상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6월 최 부상과 김 대사는 각각 외무성 아메리카국 부국장과 국무부 대북정책특별 대표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동북아시아 협력대화(NEACD)에서 상호 비난을 가한 적이 있다.
당시 김 대사는 한국, 일본 대표와 함께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을 강하게 비판했고, 최 부상은 "6자 회담은 죽었다"며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와 평화조약 체결, 세계 비핵화 등을 거론하며 "세계 비핵화 전에는 핵을 포기할 수 없다" 고 주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