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 간 사상 첫 정상회담으로 세계의 관심이 쏠리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회담이 개최를 불과 2주여 앞두고 결국 불발됐다. 비핵화와 평화의 발판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던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 취소됨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다시금 중대 고비를 맞았다.
최근 북·미 양국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이던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지금으로선 회담 개최가 부적절하다"면서 취소를 발표했다고 CNN 등 주요 외신들이 이날 일제히 전했다.
24일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부상 명의의 담화를 통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정치적 얼뜨기'라며 무례한 비난을 쏟아내고 "미국과의 대화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이 이날 미국의 회담 취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로이터 통신은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 북한이 펜스 부통령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보도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서한에서 아직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입장을 밝혀, 여지를 남겼다. 그는 김 위원장에게 "정상회담과 관련해 마음이 바뀌면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전화하거나 편지를 보내달라"며 "전세계와 특히 북한은 평화와 번영의 큰 기회를 놓쳤다. 놓친 기회는 굉장히 슬픈 일"이라고 적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회담 취소와 관련, "미국은 북·미 회담의 성공 가능성이 작다고 봤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담이 열릴 싱가포르로의 이동 및 수송 계획 등을 논의하고자 최근 며칠간 북측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취소 결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서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전화나 입장의 변화는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으나 회담 취소가 24일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뒤에 나온 것이라 충격이 클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CNN에 따르면 공개폭파 현장에 파견한 윌 리플리 기자는 전화를 통해 "현재 북한은 늦은 밤이고 우리는 원산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이었으며, 전화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의 관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풍계리의 시설을 폭파한 뒤에 이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을 황당함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리플리 기자는 이번 외신 취재가 실제로 이뤄질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졌다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풍계리에 와서 폭파 현장을 목격했으며, 북한은 투명하게 과정을 공개하고 싶고 미국과 대화를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최근에 나오고 있는 일부 관료들의 말처럼 핵 포기 이후 정권이 무너진 리비아와 비교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북한은 이들의 발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같은 일이 일어났고 현재의 상황은 더할 수 없이 어색하고(awkward) 불편하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체제보장과 경제 지원을 약속하면서 회담의 조건으로 비핵화 일괄 타결을 내걸었으나 북한은 비핵화 일괄 타결의 선례인 리비아 모델에 극도의 반감을 나타내왔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신속하게 비핵화를 이행한 뒤 서방이 지원하는 반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데다 북한은 리비아에 비해 훨씬 진보한 핵무기를 보유한 만큼 미국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는 입장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최근 북한의 태도 돌변에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정상회담에 대한 회의론이 상당히 짙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북·미 회담을 먼저 취소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이 요구하던 비핵화 일괄 타결 및 신속한 이행을 담은 '빅딜'의 성사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성급하게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수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데다 이란 핵협정까지 파기하면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자신감을 나타냈으나 회담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날 경우 자칫 정치적 낭패가 될 수 있다는 조바심을 드러냈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