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에 닿았다. 그러나 미군은 콜레라 환자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사흘이나 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제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를 떠돈 그 긴 세월도 이 사흘만큼 모멸스럽고 딱하지는 않았다.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미군 병사의 호루라기 소리를 들으면 밟아야 하는 신세. 난민수용소와 DDT 세례.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화차(貨車)였다. 기차는 제멋대로 서다가다를 반복했다. 기차가 설 적마다 웬 ‘순사’들이 그리 설치던지. 아무에게나 반말 지거리에 위세 부리는 게 일제 36년 때와 똑같았다. 왜놈 종노릇하던 것들이 누구에게 감히 눈을 부라린단 말인가. 이게 과연 해방된 조국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음을, 수당이 짐작이나 했을까.
“서울역 광장에서 서서 바라보는 해진 녘의 남대문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날이 어두웠는데도, 가로등 불빛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이었고, 참담한 귀향이었다.”(<장강일기> p269)
수당이 임정 자금을 구하러 서울에 잠입했을 때, “누구시더라?”라고 외면하던 사람들.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낮이건 밤이건 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반가워서 온 건 아니다. 당시 성엄은 한국독립당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위원에는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과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도 들어 있었다.
#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국내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하게 돌아갔다. 좌우익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고, 일본 앞잡이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활개를 쳤다. 1948년 2월 6일. 수당은 남편의 생일을 맞아 조촐한 생일상을 차렸다. 정치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단정을 지지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이승만이 1904년 특사로 풀려나 미국에 갈 때 뒤를 돌봐준 이가 동농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상해에서 성엄에게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권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성엄이 귀국 인사를 가자, 백운장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동농의 망명 뒤 백운장은 일본인 손에 넘어가 적산가옥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은인의 아들 부부를 끝내 외면했다.
1948년 봄, 백범을 중심으로 남북협상이 추진됐다. 이승만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파로 구성된 단정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백범은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다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도모하지 않겠다”며, 4월 21일 평양으로 출발했다. 한국독립당 협상 대표단은 백범, 소앙, 우천, 일파 4인과 성엄이었다.
물론 백범은 북측을 무조건 믿지는 않았다. 북조선노동당이 차린 정치선전 무대인 남북연석회의에서는 축하연설만 하고, 실권을 쥔 김일성에게 따로 지도자회담을 요구했다. 두 번에 걸친 회담 결과, △외국 군대 철수 후 제 정당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 소집 △민주주의임시정부 즉시 수립 △총선에 의한 조선입법기관 선거 후 헌법 제정이라는 민주적 통일정부 수립 방안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합의는 미소 양국과 국내 좌우익 대결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남한만의 단독총선거일은 당초 5월 9일로 잡혀 있었다. 그런데 이날이 하필이면 한반도에 백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개기일식의 날이라는 게 뒤늦게 확인됐다. 선거는 하루 연기되었고,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겼다. 해방된 조국에서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배달민족 4천년 역사 최초의 선거는, 이렇게 반쪽짜리로 치러졌다.
성엄은 끝까지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성재로부터 연락이 왔다. 수당에게 감찰위원회 위원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거듭 재고를 요청하는 성재에게 수당은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당은 정부에 참여할 뜻이 전혀 없었다. 일제강점에서 벗어나자마자 분단이라니. 생각할수록 허망하고, 통분할 일이었다.
수당은 가끔씩 경교장을 들르며, 평범한 아낙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민족의 불행은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수당이 하늘처럼 받들던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수당은 까무러쳤다. 앞으로 뭐 하실 거냐는 물음에, “나? 나야 머리에 38선이나 베고 죽지”라고 의연하게 대답하던 백범. 그의 죽음 1년 뒤, 삼천리강산을 형제자매의 피로 물들인 동족상잔의 참극이 기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