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② 새소리만으로 시를 쓴다, 김종삼의 '한 마리의 새

2018-03-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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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
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

어제처럼
세 개의 가시덤불이 찬연하다
하나는
어머니의 무덤
하나는
아우의 무덤

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
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

                  김종삼의 '한 마리의 새'


 

[이중섭의 작품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이상하게, 단조로운 시의 어느 한 귀퉁이가 푹 들어가 있다. 아래 위 같은 연을 빼고 중간부터 보면 이렇다. 세 개의 가시덤불이 나오고, 그 중에 둘의 신원이 제시된다. 가시덤불은 무덤 위에 돋아나 있는 것 같은데, 무덤은 두 개 뿐이다. 하나는 어디 가버렸는가. 이 어리둥절함이 이 시를 한참 붙들고 있게 한다.

시에서 의도적으로 감춰버린 무덤 하나. 그 무덤의 주인이 '나'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기에 무덤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죽었지만 내가 여기 나와서 시를 쓰느라 자리를 잠시 비운 것일까. 세 개의 가시덤불이 반드시 무덤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시덤불은 세 개지만 그것은 어머니 무덤과 아우의 무덤 위에 무덤덤하게 돋아오른 것이어도 상관 없다. 가시덤불이 세 개인데 무덤이 두 개이니 어쩐지 다시 결핍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죽으면 다시 남은 가시덤불 아래로 들어갈 것이니 그 또한 여백일 수 밖에.

3과 2가 서로 긴장하면서 차질을 빚는 그 무덤의 풍경이, 생과 사의 차이를 두리번거린다. 이제 위 아래로 반복되는 2행을 들여다 보자. 새 한 마리의 등장. 이것은 제목에 나오는 한 마리의 새와 같은 것이다. 제목이기도 하고, 이 시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날마다 그맘때'는 가시덤불이 찬연한 때일 것이다. 그게 언제일까. 해 넘어가는 저녁노을에 비친 가시덤불이라면, 그맘때는 저녁답이다. 날마다 그 새는 그 시각에 지저귀는 것일까. 그건 그 지저귐을 듣는 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가 앉아있는 장소인 '한 나무'는 아래의 가시덤불일까, 아니면 무덤 주위의 좀 키 큰 나무일까. 새가 유독 그 나무에만 앉는 까닭은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우연하게 들리지 않는 거기에 마음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가시덤불 위에 앉아 우는 거라면, 세 개 중에 어디에 앉은 것일까. 그걸 고를 필요는 정말 없지만, 날마다 같은 나무에만 앉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새도 이 무덤과 관련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이 무덤들 중에서 그가 택해야할 무엇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노라면 처음에는 단순해 보였던 것이, 모든 것이 모호하게 느껴진다. 새 한 마리가 '나'인지, 나의 마음인지, 나의 넋인지, 내 무덤을 지키는 존재인지, 내 어머니인지 혹은 얼마 전 돌아간 내 아우인지, 저녁답에 유독 그 새가 지저귀는 까닭은 어두워지는 무덤들을 슬퍼하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혈육을 찾는 어머니의 울음인지, 아직 죽은 존재에 익숙하지 못한 내 아우의 울음인지, 두 사람을 떠나지 못하는 나의 영혼인지, 아니면 그저 세 개의 무덤을 배회하며 비어있는 하나의 무덤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호곡인지. 이 모호함이 벋어가는 스토리들의 수많은 갈래들.

행간은 깊이 저물어 가만히 이야기를 파묻는데, 새 소리는 붉은 빛 속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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