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초반 공중전 일본군 우세
일본은 소련과의 이 대규모 전투를 중국 쪽의 지명을 붙여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의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전투기가 동원된 전쟁 수준의 전투를 ‘사건’이라고 축소시켜 놓은 것만 봐도 이 전투가 어떻게 전개돼 나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중국 공습을 통해 우세한 공군력을 과시했던 일본군은 초반전에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래서 대규모 공습을 통해 전세를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이 아니어서 거칠 것 없었던 일본군도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소련과 부딪치면서 제대로 임자를 만나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지역 상공에서는 대규모 공중전이 펼쳐졌다. 실제로 이 공중전에서는 일본이 판전승을 거두었다. 공중전에서 격추된 일본의 항공기는 160여 대였으나 격추된 소련 항공기는 4백 여 대에 이르렀다.
▶육군 대결에서 일본군 참패
일본의 관동군 항공대는 이해 6월 27일 소련의 톰스크 공군기지를 급습했다. 그 결과 소련은 백대가 넘는 전투기를 잃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승리는 여기 까지였다. 이후 이어진 지상전에서 일본은 엄청난 패배를 맛봐야 했다. 당시 소련군의 최고 사령관은 주코프(Zhukov: Жуков)였다.
[사진 = 쥬코프 소련군 사령관]
훗날 소련군 원수로서 레닌그라드 봉쇄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끌면서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구한 명장인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할힌골 전투 당시 쥬코프의 나이는 42살이었다. 벨로루스 지역 관할군 부사령관이었던 그는 페클렌코의 후임으로 이 전투를 지휘하게 됐다.
[사진 = 몽골군과 소련군 조각상]
그는 이 전쟁의 총 책임자로 나서 소련과 몽골의 연합군을 이끌었다. 몽골군 지휘관은 초이발산이었다. 주코프는 3개 소총사단과 2개 전차사단 5백여 대의 전투기, 4백여 대의 전차를 할힌골로 이동해 배치했다. 일본군은 2백여 대의 전투기와 백30여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화력과 기세 면에서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7월 들어 일본군 만 여명이 소련군을 공격했으나 소련군에게 대패하고 4-5일 만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8월 20일 주코프는 5만 명을 동원해 도강기동작전을 착수했다. 5백여 대의 전투기는 대규모 폭격작전도 병행했다. 지상군의 전력에 있어서 일본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소련군은 소형전차의 집단공격과 함께 대규모 야포 사격을 동원해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중국군과의 전투에 사용했던 경 장갑차와 경무장 장비를 그대로 들고 나와 전력에서 한 단계 뒤쳐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용감한 돌격만으로는 기계화된 군대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시이 부대의 첫 세균전
[사진 = 할힌골전투 기록 사진]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일본의 이시이 시로 부대가 처음으로 세균을 이 전투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시이 부대가 731부대로 개칭되기 이전이었다. 이시이 부대는 할힌골전투가 일어나기 한해 전부터 간첩혐의로 체포된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그리고 소련인 등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생체실험을 실시해 왔다.
[사진 = 할힌골전투 기록 사진]
이시이는 연구의 결과를 실전에 사용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할힌골전투가 벌어지자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참모본부 작전과에 근무했던 군인의 일기 속에는 “세균 작전에 대한 연구에 자신감을 가진 후 실제로 실험에 착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릿교대 이꼬 도시야교수가 소개했다
[사진 = 할하강]
이시이 부대는 일본군의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자 전염병 확산을 통해 소련군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할하강에다 장티푸스균 등의 용액을 뿌렸다. 그러나 이 세균 살포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시이 부대는 장티푸스 등의 살모넬라균은 강에 뿌려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음해에 확인했을 뿐이었다.
▶일본군 5만 명 사망
그해 9월 엿새 동안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는 일본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일본군 주력부대는 거의 궤멸상태로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은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속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 징용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포로들이 붙잡혀 울란바토르로 끌려갔다.
[사진 = 일본인 포로 건설, 울란바토르 국립도서관]
이들 일본군 포로들은 몽골에서 비참한 취급을 받으며 대부분 몽골 땅에서 숨져 갔다. 이 때 계속되고 있던 울란바토르 건설 작업에 이들 포로들이 대거 동원됐다. 몽골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일본군 포로의 참혹한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최근에도 일본은 추모단을 울란바토르에 보내 당시 숨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다. 몽골이 쿠빌라이 시대 일본원정 도중 태풍을 만나 숨진 몽골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일본 근해에서 추모제를 추진하는 것과 맥락은 같을 것이다.
▶2차 대전 후 역사방향에 큰 역할
[사진 = 할힌골 전투 기록 사진]
1,939년 9월 16일 러시아와 일본이 종전에 합의하면서 할힌골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할힌골 전투를 통해 일본은 소련이 힘겨운 상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 전투이후 소련을 공격하자던 북진파는 힘을 잃고 해군이 주도하는 남진파가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 정복의 꿈을 접는다. 북쪽 영토를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 대신 일본은 중국에 주력하면서 동남아와 태평양 침공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종전을 합의한 다음날인 9월 17일 스탈린은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다.
[사진 = 소련군 베를린 진군]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극동지역의 뒷문이 안정됐기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극동주둔 15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단 그리고 1,700대의 탱크와 천대가 넘는 비행기를 유럽전쟁에 투입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주코프는 일약 소련군대의 스타로 부상했다.
[사진 = 할힌골의 취재차량]
그는 유럽군 사령관 직을 맡아 스탈린그리드 전투에서 할힌골 전투에서 사용한 전술과 전략 등을 사용해 독일군을 곤경에 빠뜨린다.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히틀러는 동맹국인 일본에게 러시아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할힌골 전투의 패배에 대한 쓴 기억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할힌골전투는 2차 대전과 그 이후에 펼쳐진 역사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전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의 저명한 전쟁사가인 런던대학의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 ‘2차 세계대전’에서 2차 대전의 시작은 통상 알려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바로 할힌골 전투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틀러의 생사를 건 소련과의 전쟁에서 할힌골 전투는 지정학적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지적했다. 히틀러가 일본에게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전혀 응하지 않은 것은 할힌골 전투의 쓰디쓴 기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할힌골전투 승리가 독일과 일본의 소련에 대한 협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2차 대전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참패한 이 전투를 국내에는 알리지도 않고 덮어버려 일본인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야 이 전투의 결과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