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3] 몽골은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가 되나? ①

2018-03-29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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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몽골을 염두에 둔 용어 ‘위성국가’
흔히 몽골을 세계 두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한다. 소비에트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회주의 체제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련과 관련해 몽골에 붙여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위성국가라는 말이 그 것이다.

[사진 = 동구권 舊소련 위성국가]

냉전구도가 종식되면서 이 위성국가라는 말은 역사적인 개념으로 퇴색되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 동서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가군(國家群)에 주로 이 개념이 적용 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위성국가 하면 동구권국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위성국가라는 말의 기원은 몽골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말은 미국의 아시아 전문학자 라티모어(Lattimore)가 몽골을 염두에 두고 고안한 개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행성에 종속된 위성
이 말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현대인의 생활에서 뗄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온 위성(Satellite)의 의미를 새겨보면 이해가 될법하다. 위성은 원래 어떤 중심 되는 행성의 주위를 인력에 의해 돌면서 운행되는 천체를 말한다.

[사진 = 인공위성]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위성은 주로 인공위성이다. 특수목적을 띠고 지구 주위를 돌면서 각 방면에 걸쳐 현대인의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는 것이 이 인공위성이다. 물론 다른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도 있지만 그 것은 행성자료 수집을 위한 목적에서 보내진 것들이어서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어째든 위성은 모행성(母行星)에 종속된 것으로 그 궤도를 벗어나면 그 존재가 위태로워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주도국에게 종속된 체제
위성국가의 개념도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모행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소련이 있고 그 주위에서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라들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독립 주권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해도 주도국인 소련의 정치 군사적 개입에 의해서 그 정치체제가 성립된다.

국가의 존재 역시 주도국에 의존한다. 주도국과 위성국의 관계는 주로 조약 형식으로 규정돼 있지만 안전보장을 비롯한 모든 사항은 주도국의 뜻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다 보니 독자적인 행동이 사실상 어렵다. 국제사회 무대에서도 항상 주도국과 동일한 보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위성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거의 대부분 주도국에서 교육을 받고 주도국 지휘부와 가치체계와 이해의 폭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자연히 위성국의 모든 정치 사회 체계는 주도국의 것을 모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도국의 정치 사회적 변동은 곧바로 위성국에 그대로 반영된다. 위성국가에 대한 개념 파악이 향후 소련과 몽골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민정부 수립 후 과도기
1,921년 7월 인민정부가 수립되면서 곧바로 몽골과 소비에트가 주종관계로 확실히 맺어진 것은 아니었다. 인민정부 수립 후 몇 년 동안은 공산주의 사상마저 몽골에 별로 침투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의 관계가 몽골의 위상을 설정하는데 변수로 남아 있었다.
 

[사진 = 젭춘담바 쿠툭투 8세]

몽골이 어떤 과정을 거친 뒤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하며 소련의 최초 위성국으로 자리 잡았을까? 인민혁명에 의해 몽골 인민정부가 탄생했지만 국가 원수는 여전히 젭춘담바 쿠툭투 8세였다.
 

[사진 = 수흐바타르]

물론 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 등 젊은 혁명 주도 세력이 체제를 이끌어 가기는 했지만 겉모양은 복드칸 체제를 완전 부정하지는 않았다.

혁명과 함께 체제를 완전 뒤엎었던 소비에트의 경우와는 다소 달랐다. 이는 몽골의 인민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을 띠었다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체제를 다시 세웠다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제공산주의 위한 코민테른 출범

[사진 = 코민테르 포스터(1,919년)]

잠시 몽골의 혁명을 지원했던 소비에트 측의 사정을 보자. 당시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취한 가장 우선적인 외교정책은 ‘세계혁명(世界革命)’ 전략이었다.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북돋우어서 세계 곳곳, 특히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을 조정하는 하나의 사령탑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1,919년 결성된 것이 코민테른(Comintern)이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자이다. 원래 1,2차 인터내셔널은 국제 노동자협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사진 = 레닌의 코민테른 창설 서명]

그러나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조직이 자본주의 재건에 활용되는 등 변질되고 있다고 판단한 레닌이 3차 인터내셔널을 아예 코민테른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다. 이들의 강령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기본적 전제의 기초 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등 레닌이 세운 이론들을 포함시켰다.

레닌은 후진국은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원조를 받아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를 뛰어넘어 소비에트 제도로 이행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일정한 발전 단계를 거치면 공산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반도에서 기미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에서는 코민테른 제 1차 대회가 열렸다.
 

[사진 = 코민테른 2차대회서 연설하는 레닌]

그러나 이 때 국제공산당을 앞세워 등장한 코민테른은 세계혁명 보다는 소비에트 정부의 국가 이익에 봉사하는 성격이 짙은 기관이었다. 2차 대회는 이듬해 7월 레닌그라드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조선의 항일 민족 운동가인 박진순(朴鎭淳)도 고려공산당 대표자격으로 참석했고 대회장에 태극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3차대회가 열린 1,921년까지 국제 혁명 운동은 레닌도 인정했듯이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약소국가의 독립운동 과정에 공산주의 사상과 세력을 침투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소련의 등장

[사진 = 소련의 등장]

레닌의 세계혁명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이 달성된 지역에서는 종래의 국가 유형과 다른 연방국가가 수립돼야 한다. 그러한 논리의 바탕 위에서 1,922년 열린 제 10차 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혁명이 이루어진 4개의 사회주의 공화국 사이에 연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을 탄생했다. 약칭 소련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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