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으르렁거리는 북만주
섣달바람 먼지 낀 창에 들이쳐 덜컹거린다.
카메라 뒤쪽 검은 베일 덮어쓴 곰보 사진사.
그의 말짓에 따라 고개를 당기고 민다.
좁은 마루 의자에 앉은 여자. 난로 속에서 타닥이는
땔감나무 터지는 소리가 소스라친다.
도마(안중근) 총성이 울린지 24년
하얼빈 하늘은 늘 귀성(鬼聲)이다.
첩자는 들끓고 죽음의 공기는 떠돈다.
흰옷 차려입은 여자를 보며 환갑 나이로는 안 보인다며
늙은 사진사 껄껄거릴 때 K를 떠올렸다.
며칠 뒤 또하나의 도마가 하얼빈을 진동시킬테니
깨끗한 최후 사진이라도 찍어두라고 말했던 그 사람,
대양 3원을 받아쥐고 달려온 여자를 살피는 저 눈.
눈빛에 찔려 문득 제풀에 제 혀를 찬다. 혁명을 하자는 것이냐
낭만을 하자는 것이냐.
총알 하나, 부토(일제 만주전권대사)를 죽이고
다른 하나, 내 이마를 쏘는 일
피 흘리는 육신이 고마운 기념이지, 사진은 무슨 사진이람.
굳이 또다른 흔적을 남기겠다는 허영(虛榮)이라니,
스스로 가소롭다. 그날 틈틈이 필사한 성경(聖經)을 건넸을 때
그는 불쑥 말했다. “지금 우리는 하늘을 믿는 것보다
서로를 믿는 것이 더 필요한 때 같습니다.”
사진을 남기는 건 흔적을 남기는 것, 여자를 쫓는 이들에겐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 밀정 이종형이 그녀를 잡아 넘기려
혈안이 되어 있다던데 K가 끄나풀인가. 곰보사진사는
일제 경찰에 이어져있는 후각 좋은 개가 아니던가.
사진관 나올 때 눈발이 이마 치듯 불길한 예감.
하얼빈은 지금 천지가 어둑어둑 피아(彼我)가 뒤섞인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1933년 2월27일 아침에 몸을 씻고 피묻은 옷을 입는다.
37년전 죽은 사내의 옷을 속옷처럼 껴입는다.
진보 흥구동 골짜기에서 마지막 체온을 지킨 그옷
마침내 죽을 전투를 나가며 그 옷을 입는다.
옷 속에서 빠져나간 한 남자의 길
옷 속으로 들어온 한 여자의 길.
살면 남편과 함께 산 것이요
죽으면 김영주와 함께 죽는 것이다.
꾸둑한 피얼룩 어루만지며 시간이 식히지 못한 사랑에 떤다.
여보, 나를 도마처럼 죽게 해주시오.
칼과 송곳으로 얼굴에 상처내고 흙과 검댕 바르고 머리칼을 흩으니
더러운 옷 속에 미친 거지할멈, 남자현이냐.
60년 알던 몸도 알아보지 못하겠구나
다리 절뚝이며 길림가로 걸어간다. 무기를 건네받아
만주국 수립 기념식에 선 부토의 가슴에
탄환을 박으리라. 품에 안은 폭약으로
일제의 잔치판에 곡성을 덮으리라
오후 3시45분 도외정양가 거리
길 저편에 얼핏 K처럼 보이는 얼굴
여자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순간 호각소리, 총성.
경찰들이 우루루 달려와 여자를 덮친다.
하얼빈 하늘에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
잿빛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흩어진다.
팔이 꺾이고 외투가 벗겨지자
속옷처럼 껴입은 사내 군복
옛 핏자국 위로 새로운 피 터져 흐른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