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⑨]만주 독립진영 통합운동, 유일당 운동

2018-02-0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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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2개 단체로까지 거듭 났으나, 완전통합은 무산

[사진 = 2012년 음악극'백야(연출 최용훈, 음악감독 이형주)'에서 보여준 독립군 훈련 모습.]



#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만주 3부'시대=1920년대 후반 만주에 산재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수행을 위하여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다. 1922년 8월 환인현에서 군정서 등 7개 단체들이 대한통의부로 결집되어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졌으나 대한통의부는 주도세력간에 분열이 생겨 일부세력들이 1923년 분리되어 나가 각각 의군부와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1925년 대한통의부·대한독립단 등이 중심이 되어 정의부를 발족했고, 대한독립군단·북로군정서를 통합해 신민부를 만든다. 이로써 참의부·정의부·신민부라는 3부가 성립되었고, 이들 단체들은 만주의 교포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 유일당 운동, 북경 촉성회와 조선 신간회 =이후 한걸음 더 나아가 3부를 포함, 좌우익의 민족독립운동을 합작하여 단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곧 민족유일당운동이다.

이 운동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중국 북경이었다. 1926년 10월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고,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라고 개칭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은 국내로도 파급되었고, 1927년 2월 신간회의 창립으로 결실을 보았다.

중국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그것은 같은해 4월 상해 촉성회, 5월 광동 촉성회, 9월 남경 촉성회의 창립으로 나타났다. 

# 1928년 길림성 전민족 유일당회의 논쟁 =1928년 5월 전민족 유일당회의가 좌우파 18개 단체 대표가 모인 가운데 길림성에서 개최되었다. 회의는 유일당의 조직방법문제를 둘러싸고 단체본위 또는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측으로 나누어져 서로 격론이 벌어졌다. 협의회 중심단체인 정의부는 1928년 7월 참의부와 신민부에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삼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하면서 유일당건설운동을 새롭게 추진하였다.

회의는 같은 해 9월 정의부대표 김동삼(金東三) 등 5명, 신민부대표 김좌진(金佐鎭) 등 7명, 참의부대표 심용준(沈龍俊) 등 3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회의에서 상호간 통합방법에 있어 정의부가 단체중심조직론을 제시한 반면, 신민부와 참의부는 3부를 완전해체하고 새로이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입장을 보여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 2개단체로 통합했으나 완전통합은 실패 =1928년 12월 촉성회측은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의 일부를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 일명 혁신의회를 구성하였다. 협의회의 중심세력인 정의부는 1929년 4월 참의부의 일부 세력과 신민부의 민정파와 합쳐 국민부를 조직하고,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해체하였다. 결국 1920년대 후반기의 민족유일당운동은 독립운동단체의 재만책진회와 국민부 등 두 단체로의 통합까지는 이루었으나, 이들 두 단체를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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