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과 중국 마적단 간에 가끔 알력이 있었다. 조선 독립투쟁을 벌이는 청년들 중에 중국 마적단으로 가버린 사람이 있었다. 청년은 독립군 부대로서는 귀하디 귀한 말을 타고 가버렸다. 남자현은 마적단 두목 앞으로 편지를 썼다.
이런 서신에 뜻밖에 흔쾌한 전갈이 왔다. “이번 길에는 화순현 쏘구를 습격하러 갑니다. 싸움이 급하여 그냥 나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상의를 하는 것이 어떨지요?”
마적단은 평안북도에 있는 한 경찰서를 털었는데 순사들이 겁에 질려 모두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마적 두목은 조선 독립군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감옥에 있던 독립군을 석방시켰다. 또 기관총과 탄약을 싣고 돌아와 독립군과 함께 쓰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말과 병사는 돌려주었다.
#"여성도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 강조한, 액목현의 선생님
액목현에서 그녀가 한 주된 일은 교육사업이었다. 1921년 액목, 화전, 반석에 20개가 넘는 여성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또 북만주 12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농촌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이것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교육과 포교를 동시에 한 것이다. 교육은 애국심 고취, 독립군 정신교육, 친절 봉사 교육, 문맹 퇴치를 목표로 삼았고, 일반 학문을 비롯해 중국어도 가르쳤다. 특히 그녀는 여성 또한 독립투쟁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의군(女義軍)’이 제대로 육성되어 직접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만났던 손정도 목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이 무렵 손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 가 있었다.
여성단체를 조직하는데 있어서는, 김동삼, 현익철, 오동진, 여준, 황학수, 이동녕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정의부의 중앙 여성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 1921년 그녀가 삼송육도구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부상당한 독립군부대 청년들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두 차례 손가락을 자르며 호소하다
만주사회에 깊이 남자현을 각인시킨 일은 단지혈서(斷指血書) 사건이었다.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군단과 독립단체들은 서로 반목하는 일이 많았다. 남자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이 통합적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먼 데까지 망명을 와서 서로 작은 입장 차이로 우리가 해야 할 큰 일을 놓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것이지, 동포끼리 서로 적대시하여 의미없는 피를 흘리는 분쟁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즈음 남자현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것은 두 차례의 기록이 남아 있다. 첫 번째는 1920년 8월29일 국치기념대회 때였다. 그녀는 여시당(준), 이동녕, 황학수, 이탁 등 리더들을 포함해 100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장문의 혈서를 썼다. 그리고 그 글을 큰소리로 읽으니 청중들이 오열했다고 한다. 독립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내용뿐 아니라, 우리 진영의 분열에 대한 준열한 질타가 그 내용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쓴 혈서는, 1922년 3월 환인현에서 독립군들끼리 격하게 충돌하는 일이 발생한 뒤였다. 남자현은 “독립운동계여, 단결하라. 우리는 강토를 빼앗은 일본과 싸우러 왔지 동족과 싸우러온 것이 아니다. 피 한 방울이라도 적을 위해 써야 하거늘, 같은 조선인을 해치는데 쓴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검지손가락을 단지한다. 이미 엄지 한 마디를 잘라낸 남자현이 다시 검지를 자르려 하자, 사람들은 놀라 말렸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 손가락을 아끼지 말고 동포와 내일을 아끼시오
“내 손가락을 아끼지 말고, 우리 동포를 아끼고 이 나라의 내일이나 아끼시오.” 만주 조선인들은 그녀의 이같은 뜻을 기려 ‘손가락 목비(木碑)’를 세웠다. 남자현의 이같은 충정에 한때 독립진영의 단결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알력과 반목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1923년 상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 대표 100여명이 모여 6개월에 걸쳐 국민대표회를 열어 통합독립운동을 논의하였으나, 이 회의 이후에 다시 창조파, 개조파, 고수파 등 내부혁신 정도에 대한 이견 때문에 다시 분열하였다. 하지만 남자현의 단지(斷指)는, 그녀를 만주사회의 통합에 앞장서는 상징적 인물로 부각시켰다. ‘독립계의 대모(大母)’, 혹은 ‘세 손가락(三指) 여장군’의 별명이 붙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독립군 중대장 이창을과 이장청을 양자-양녀로 두다
액목현에 살던 시절,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부대의 중대장 이창을(李昌乙)을 양자로 정하고 그를 결혼시켜 손자와 손녀 한 명씩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전혈소라는 사람이 일본 경찰에 그녀를 밀고하여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여순에서 사형구형을 받았고 이후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고 하나,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이 기록이 어느 정도까지가 사실인지, 만약 감옥에 갇혔다면 언제 출소했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지만 아쉽게도 기록들은 단편적인 내용으로 끊겨있다.
이 즈음 남자현이 손정도 목사의 집에 유숙했다는 내용이 있다. 손 목사는 1920년 이후 길림성을 중심으로 농민합작사를 설립했으며 길림 한인교회를 세웠다. 그는 액목현에 삼천일경(日耕) 되는 농토를 구입하고 동포를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교회에는 부설학교도 세워 교육에 힘썼다. 손 목사의 집은 길림성 시외의 신개문 바깥에 있었다고 한다. 손 목사와 남자현 사이에 만주 생활 동안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남자현은 양녀를 만났다고 한다. 딸의 이름은 이장청(李長靑)인데, 천마산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남자현은 독립군 부대의 간부남녀 두 사람을 양자와 양녀로 두고 있었던 셈이 된다. 딸로 기록되어 있는 이장청이, 이창을과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의 양며느리일 가능성도 있다.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 김성삼 부부가 있었는데도(1923년 액목현 교화(1935년엔 신참)에 아들 부부를 살게 하였다) 군인들을 기꺼이 양아들딸로 삼은 것은 낯선 땅에서 부모도 없이 외로워하는 이들을 혈육처럼 보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