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4] 갈단은 어떤 제국을 꿈꾸었나? ③

2018-03-0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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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갈단과 강희제의 대결 시작

[사진 = 강희제]

1,688년 봄, 갈단이 이끄는 준가르의 대군이 몽골 고원으로 들어섰다. 상당 기간 동안 초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갈단과 청나라 강희제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7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강희제는 이때 즉위한지 27년을 넘어 30대 중반을 맞고 있었다.

▶ 맑고 투명한 타미르강

[사진 = 타미르강]

항가이 산맥에서 발원해 서부 초원을 굽이쳐 7백리를 흘러가는 타미르(Tamir)라는 강이 있다. 이 강이 흘러가는 주변 지역은 강을 따라 형성된 숲과 드넓은 초원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강을 ‘맑고 투명한 타미르’, 즉 ‘퉁갈라그 타미르’라고 부르고 있다. 같은 제목의 소설이 몽골의 국민소설로 몽골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 초원의 유목촌]

1950년대 차드라발 로도이담바라는 작가가 쓴 이 소설은 10년 전에 몽골 전문 학자로 몽골 비사를 번역했던 유원수교수가 9년간의 작업 끝에 한국어판으로 출간했다. 소설 속에는 20세기 초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유목민의 삶이 아름다운 타미르강 주변을 무대로 펼쳐진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사진 = '맑은 타미르강' 표지]

현지에서 만난 지금의 타미르강은 여전히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한적한 초원을 가로 질러 흘러가고 있었다. 주변의 유목민들도 어느 초원의 유목민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할하 좌익 타미르에서 참패
이 타미르강이 흘러가는 주변의 타미르 지역은 준가르에서 항가이산을 넘어 몽골 고원으로 들어온 갈단의 군대가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 칸 군대와 처음으로 마주친 곳이다.

넓은 초원에서 마주친 두 세력의 첫 대결은 준가르 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5천 명의 병사로 맞선 할하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겨우 백 명 남짓만 살아서 달아났다. 패배한 할하의 투시에트 칸 차궁도르지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 청나라로 달아난 쳅춘담바
갈단은 여기서 준가르군을 둘로 갈라서 할하 지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갈단이 이끄는 군대는 몽골 고원 중앙의 툴강을 건너 동부의 케를렌강 너머까지 진격했다. 갈단의 다른 부대는 공격의 목표를 과거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잡았다. 갈단이 특별히 카라코룸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진 = 에르데니 주 사원]

하나는 그 곳 에르데니 주 사원에 있는 젭춘담바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전세의 제자인 그가 자신의 스승인 달라이 라마 5세의 대리인과 동등하게 행동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를 장악함으로써 자신이 전 몽골민족의 지도자가 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갈단의 군대가 내습했다는 소식을 들은 젭춘담바는 일단 동쪽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내몽골 지역으로 달아나 청나라 강희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과거 대원제국의 여름수도였던 상도에서 강희제를 처음 만난 젭춘담바는 강희제에게 매료돼 이후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 할하 좌익, 청나라에 보호 요청

[사진 = 돌룬노르(상도)]

타미르에서 갈단군에게 패했던 투시에트 칸은 같은 해 가을, 다시 전열을 정비해 동몽골의 오르고이 노르라는 호반 근처의 평원 지역에서 갈단군과 재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사흘 동안 이어진 초원의 대결전에서 갈단군은 할하군을 제압했고 전투에서 패한 할하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투시에트 칸과 할하 지도자들은 고비사막을 넘어 내몽골 지역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후흐호트로 피신했다가 청나라 강희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동생 젭춘담바가 강희제의 보호아래 있는 상황이라 투시에트 칸은 쉽게 강희제로부터 피신처를 제공받았다. 이후 내몽골로 향하는 할하의 망명인들이 이어져 수십만 명이 청나라의 보호막아래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강희제는 중국 본토에서 곡물을 실어와 이들을 구제해준 데 이어 막남 몽골의 목초지와 함께 가축까지 이들에게 나눠줬다. 이는 강희제가 갈단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비롭다는 평판을 얻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즉 대외선전 효과를 노린 측면이 강했다. 강희제 특히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 라마들에게 공을 들여 티베트 불교의 교파가 몽골족 지지에서 만주족 지지로 돌아서도록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사진 = 고비사막]

그렇기는 하지만 할하의 주도 세력들이 대부분 고비사막을 넘어 청나라의 보호 아래로 숨어들면서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 고원은 완전히 갈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 갈단, 투시에트 칸 형제 인도 요청

[사진 = 강희제에게 신종하는 몽골인]

몽골 고원을 장악한 갈단은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동생을 살해한 투시에트 칸 차궁도르지와 그의 동생 젭춘담바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강희제는 자신에게 보호를 요청했던 할하 우익의 군주와 티베트 불교의 고승을 적에게 쉽게 넘겨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들을 넘겨준다면 우선 저절로 굴러 들어온 성과물을 놓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넘겨줄 경우 이미 청나라의 지배아래 있는 막남 몽골인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결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강희제는 갈단과 투시에트 칸을 화해시켜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갈단은 이 같은 청나라의 요청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 불가피해진 준가르와 청 대결

[사진 = 보이르 호수]

당시 갈단의 준가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부터 몽골 동쪽 보이르호수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갈단은 이제 청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간 막남 몽골과 만주지역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사태를 심상치 않게 봤다. 몽골에 출현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남하를 노리는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되는 경우 청나라로서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 = 케룰렌강]

그래서 아무르강 국경 분쟁을 서둘러 매듭지어 러시아와 1,689년 8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갈단이 연합할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690년 여름, 갈단은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케룰렌강을 따라 만주지역 근처까지 진출했다.

갈단군은 대흥안령산맥의 서쪽 지역에서 청나라의 장수가 지휘하는 할하 몽골인 군대를 격파하고 달아나는 그들을 쫓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강희제는 새롭게 떠오른 몽골 제국이 청나라의 코앞에서 일어서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내몽골 지역까지 밀고 내려오자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준가르와 청나라의 대결이 불가피한 수순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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