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김여정과 이방카, 민족과 동맹

2018-02-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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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김여정 다음은 이방카인가. 정부는 평창올림픽 폐막식(25일)에 참석할 이방카에게 국가정상에 준하는 의전을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오기 때문이라지만 아무래도 김여정과 균형을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 탓이 커 보인다. 김여정은 오빠 김정은의 친서를 들고 와 개막식을 휘저어 놓았다. 융숭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자리를 함께한 게 네 차례다. 이방카 또한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할 터다.
짐작하겠지만 김여정은 ‘민족’을, 이방카는 ‘동맹’을 상징한다. 1980년대 이래, 우리는 ‘민족’과 ‘동맹’의 충돌을 일상(日常)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그걸 평창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올림픽이라는 배경 속에서 북·미(北·美) 최고 권력자의 핏줄들이 벌이는 경쟁과 암투는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분단이라는 ‘원천 비극’의 한 장을 보는 듯해 비애감마저 든다.

1972년 7·4 공동선언에서 민족 대단결이 평화통일의 3원칙(자주, 평화, 민족) 중의 하나로 천명된 이래 ‘민족’은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이상(理想)이자 절대선이었다. 이산가족 상봉에 가슴 설레고 단일팀 얘기만 나와도 피가 끓었다. ‘민족’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민족 공조’(민족끼리)라는 일종의 실천규범으로 발전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민족’이란 구호 뒤에 숨어 있는 기만과 위선 또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민족 공조’만 해도 그러했다.

‘민족 공조’란 ‘한·미 공조’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이 만든 구호다. 1980년대 이래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했다. 한·미 공조는 양국의 최우선 목표이자 전략이었다. 이에 맞서 북한은 ‘민족 공조’란 조어(造語)를 들고 나왔다. 북은 틈만 나면 ‘민족 공조’를 부르짖었지만 그 뒤에선 핵 개발에 매진했고 결국 성공했다. 우리가 아는 ‘민족’과 북한이 말하는 ‘민족’은 다르다는 자각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김일성 민족’이라는 말도 그때 나왔다.

‘민족’은 김여정에 의해 평창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한 논객은 칼럼을 통해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과 펜스 미 부통령을 비교하면서 펜스가 더 호전적으로 비친다고 썼다. “북한대표단이 평창과 서울에서 최근의 군사적 위기를 풀기 위해 외교를 하려 애쓴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줬다. 외교적 노력을 아예 무시하고 속내를 드러낸 건 펜스 부통령이다··· 평창에서 미국이 보인 건 패권적이고 오만한 트럼프 행정부의 민낯이다.”

인상비평 수준이지만 외신도 대체로 김여정에 대해 호의적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북한의 이방카가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CNN 방송은 올림픽에 ‘외교댄스’ 종목이 있다면 김여정이 금메달감이라고 치켜세웠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다고 느꼈으면 오빠 김정은이 평창에서 돌아온 김여정의 손을 잡고 그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했을까.

‘민족’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제 이방카가 온다. ‘동맹’이라는 깃발을 들고. 그는 여러 가지로 불리해 보인다. ‘민족’이란 정서에 밀리기도 하지만 역시 아버지가 가장 큰 부담이다. 하필 이때 아버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가능성을 공언하고, 방위비 인상을 거론할까. 한국GM이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란 얘기는 왜 또 했을까, 아버지가 야속할 터이다. 한때 패션모델을 했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이미지도 감점 요인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미국적인 그의 모습은 요즘 같은 한국사회 분위기에선 호감을 사기 어렵다(이런 점에서 수수하고 다소곳해 보이는 김여정을 내려보낸 김정은은 실로 ‘신의 한수’를 둔 셈이다).

이방카는 총명하고 똑똑해서 아버지의 신임이 두텁다고 한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국정에 두루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언론은 이런 장점을 들어 이방카가 김여정 못지않게 한국인의 마음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허나 이미지 대결이 되면 자칫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

이방카가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동맹’은 ‘민족’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다. 전후(戰後) 독립한 85개 신생국 중 30년이란 최단기간에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 발판이 되어준 게 ‘동맹’이다. 한·미동맹이 제공한 대북 억지력이 없었다면,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이 열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게 가능이나 했겠는가.

김여정은 청와대 방명록에 “평양과 서울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서 더 가까워지고 통일번영의 미래가 앞당겨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썼다. 이방카는 방명록에 한·미동맹의 발전과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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