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갈단]
바로 앞으로 상당 부분 언급하게 될 준가르의 지배자 갈단이 바로 이 웬사 투르크의 전생(轉生)이기 때문이다. 즉 웬사 투르크가 죽은 뒤 갈단이라는 인물로 태어났다는 얘기다.
▶몽골과 오이라트의 화해

[사진 = 복드칸 겨울 궁전]
그래서 할하 우익의 자삭투 칸의 제창으로 할하의 좌우익과 오이라트의 여러 세력이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할하 영주 13명과 오이라트 영주 15명이 참가해 이른바 몽골․오이라트 법전을 제정했다. 이 회의는 무엇보다 그 때까지 적대 관계에 있던 동서 몽골이 화해를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실패한 카자흐 원정
앞서 언급한 오이라트 승려 자야 판디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준가르의 수장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오이라트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이라트 수장 중에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43년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카자흐 원정을 주도한다.

[사진 = 카자흐인들 ]
하지만 이 원정에서 바아토르가 이끈 오이라트 연합군은 전투에서 패해 큰 손해만 입고 돌아왔다. 이후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1,653년에 숨졌다. 그가 죽었을 때 자야 판디트는 준가르로 초대받아 법요를 거행했다.
▶유산투쟁으로 살해된 갈단의 형 셍게
바아토르의 첫 번째 부인은 러시아로 이주한 토르구트 수장 코 오르로크의 딸 다라 우바상차였다. 두 번째 부인은 호쇼트 구시 칸의 딸 아민타라였다. 바아토르가 죽은 뒤 준가르의 지배권은 아민타라가 낳은 큰아들은 셍게에게 넘겨졌다.

[사진 = 만불상(萬佛像)]
호쇼트부 지도부의 형제인 오치르트칸과 아부라이까지 양편으로 갈라져 각각 다른 세력을 지원했던 이 유산투쟁에서 초반에는 셍게가 이겼다. 하지만 10년 남짓 뒤인 1,670년 셍게는 결국 이복형제인 세첸과 바아토르에게 암살되고 만다.
셍게의 죽음은 고승의 전생자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져 불교 수업을 받고 있던 친동생 갈단의 개입을 부르고 있었다.
▶갈단으로 환생한 高僧

[사진 = 영화 속 준가르군]
나름대로 이해가 쉽도록 하느라고 노력은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쉽게 당시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한 번씩 앞을 더듬어서 다시 읽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갈단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얘기를 좀 더 단순하게 전개시켜보자.

[사진 = 카자흐 초원 유목민]
1,639년 웬사 투르크는 당시 5살이었던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 칸 곰보의 아들에게 출가의 계를 주었던 인물이다. 출가의 계를 받았던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좌익 할하의 젭춘담바다. 그러니까 젭춘담바는 갈단으로 보면 자신의 전세(前世) 제자인 셈이다.
이러한 인연이 나중에 준가르와 할하 좌익의 관계 설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갈단, 10년 간 티베트에서 수업

[사진 = 타쉬룬포 사원 (시가체)]
판첸라마(Panchen Lama:班禪喇嘛)제도는 이때 달라이 라마 5세가 스승을 위해 만든 제도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스승 롭상 체키 갈첸을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4대 판첸라마로 임명했다.

[사진 = 울란바토르 교외 불상]
그 후 시가체에서 행사를 주관하다 갑자기 숨졌다. 중국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에 암살됐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초반에 중국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그는 결국 나중에는 티베트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1대 판첸라마로 겐둔 치에키 니마를 지명했지만 그는 곧바로 중국 공산당에 체포돼 감금된 뒤 20년 이상 소재와 생사가 불분명하다.

[사진 = 기알첸 노르부(중국 지명 11대 판첸라마)]
1,662년 판첸라마 4세가 92살의 나이로 죽자 라싸로 이주해 달라이 라마 5세를 스승으로 모셨다. 여기에서 5년 간 더 수업한 갈단은 10년 만에 준가르 지역으로 돌아왔다.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승복과 진주로 만든 염주 등을 주면서 황교의 이익에 맞는 생활을 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