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1]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는 어떻게 등장하나? ②

2018-02-2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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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웬사 투르크의 轉生 갈단

[사진 = 갈단]

자야 판디트는 1,640년 몽골․오이라트 회의에도 다른 두 명의 고승과 함께 참석했다. 이 때 자야 판디트와 함께 회의에 참석한 티베트의 고승이 웬사 투르크다. 곧 언급되겠지만 이 웬사 투르크라는 인물을 기억해 두자.

바로 앞으로 상당 부분 언급하게 될 준가르의 지배자 갈단이 바로 이 웬사 투르크의 전생(轉生)이기 때문이다. 즉 웬사 투르크가 죽은 뒤 갈단이라는 인물로 태어났다는 얘기다.

▶몽골과 오이라트의 화해
잠시 1,640년 열린 몽골․오이라트회의를 살펴보자. 1,640년 당시의 정세는 막남(漠南)의 내몽골은 이미 만주인의 휘하로 들어가 있었다. 막북(漠北)의 할하부만 그럭저럭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항상 불안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 = 복드칸 겨울 궁전]

할하는 우선 동쪽의 좌익을 중심으로 이제 막 발진한 청나라에 우호사절은 보내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동시에 할하 우익은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오이라트와 손을 잡고 예상되는 청나라의 압박에 공동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하 우익의 자삭투 칸의 제창으로 할하의 좌우익과 오이라트의 여러 세력이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할하 영주 13명과 오이라트 영주 15명이 참가해 이른바 몽골․오이라트 법전을 제정했다. 이 회의는 무엇보다 그 때까지 적대 관계에 있던 동서 몽골이 화해를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실패한 카자흐 원정
앞서 언급한 오이라트 승려 자야 판디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준가르의 수장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오이라트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이라트 수장 중에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43년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카자흐 원정을 주도한다.
 

[사진 = 카자흐인들 ]

10년 전 한 차례 오이라트의 카자흐 원정이 있었지만 그 때의 원정은 도르베트부의 다라이 타이시가 주도했었다. 바아토르가 주도한 카자흐 원정에는 오이라트 여러 세력이 참가했다. 오이라트와 연맹을 맺고 있었던 에린칭, 즉 할하의 알탄칸 3세도 이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원정에서 바아토르가 이끈 오이라트 연합군은 전투에서 패해 큰 손해만 입고 돌아왔다. 이후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1,653년에 숨졌다. 그가 죽었을 때 자야 판디트는 준가르로 초대받아 법요를 거행했다.

▶유산투쟁으로 살해된 갈단의 형 셍게
바아토르의 첫 번째 부인은 러시아로 이주한 토르구트 수장 코 오르로크의 딸 다라 우바상차였다. 두 번째 부인은 호쇼트 구시 칸의 딸 아민타라였다. 바아토르가 죽은 뒤 준가르의 지배권은 아민타라가 낳은 큰아들은 셍게에게 넘겨졌다.
 

[사진 = 만불상(萬佛像)]

아민타라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이 갈단으로 그는 바로 셍게의 친동생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배다른 형제들은 셍게가 준가르의 지배권과 함께 부족민의 절반을 상속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1,657년 준가르에서 유산을 둘러싼 형제들 간의 투쟁이 발생했다.

호쇼트부 지도부의 형제인 오치르트칸과 아부라이까지 양편으로 갈라져 각각 다른 세력을 지원했던 이 유산투쟁에서 초반에는 셍게가 이겼다. 하지만 10년 남짓 뒤인 1,670년 셍게는 결국 이복형제인 세첸과 바아토르에게 암살되고 만다.

셍게의 죽음은 고승의 전생자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져 불교 수업을 받고 있던 친동생 갈단의 개입을 부르고 있었다.

▶갈단으로 환생한 高僧

[사진 = 영화 속 준가르군]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 제국을 세운 갈단이 등장할 때까지 몽골과 오이라트 정세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 상당히 복잡하고 힘들었다.

나름대로 이해가 쉽도록 하느라고 노력은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쉽게 당시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한 번씩 앞을 더듬어서 다시 읽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갈단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얘기를 좀 더 단순하게 전개시켜보자.
 

[사진 = 카자흐 초원 유목민]

바아토르 홍타이지의 아들 갈단은 1,644년 구시 칸의 딸 아민타라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아토르가 카자흐 원정에 나가 있던 때였다. 갈단은 태어나자마자 한해 앞서 죽은 티베트의 고승 웬사 투르크가 환생한 것으로 인정됐다.

1,639년 웬사 투르크는 당시 5살이었던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 칸 곰보의 아들에게 출가의 계를 주었던 인물이다. 출가의 계를 받았던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좌익 할하의 젭춘담바다. 그러니까 젭춘담바는 갈단으로 보면 자신의 전세(前世) 제자인 셈이다.

이러한 인연이 나중에 준가르와 할하 좌익의 관계 설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갈단, 10년 간 티베트에서 수업

[사진 = 타쉬룬포 사원 (시가체)]

1,656년 13살 난 갈단은 티베트 라싸로 가서 달라이 라마 5세를 알현했다. 하지만 자신의 전생인 웬사 투르크의 재산이 西티베트에 있었기 때문에 시가체 지방에 있는 타쉬룬포(bkra-shis lhun-po)사원으로 가서 좌주(座主)인 4대 판첸라마의 제자로 들어갔다.

판첸라마(Panchen Lama:班禪喇嘛)제도는 이때 달라이 라마 5세가 스승을 위해 만든 제도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스승 롭상 체키 갈첸을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4대 판첸라마로 임명했다.
 

[사진 = 울란바토르 교외 불상]

1대에서 3대까지의 판첸라마는 타쉬룬포 사원의 지도자를 소급해 적용했다. 티베트의 제 2인자로서 자리를 이어온 판첸라마는 현재 11대에 이르고 있다. 1,989년에 입적한 판첸라마 10세는 중국정부가 그를 티베트 지배에 이용하려는 데 협조하지 않아 압송된 뒤 10년 가까이 감금 생활을 했다.

그 후 시가체에서 행사를 주관하다 갑자기 숨졌다. 중국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에 암살됐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초반에 중국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그는 결국 나중에는 티베트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1대 판첸라마로 겐둔 치에키 니마를 지명했지만 그는 곧바로 중국 공산당에 체포돼 감금된 뒤 20년 이상 소재와 생사가 불분명하다.

[사진 = 기알첸 노르부(중국 지명 11대 판첸라마)]

대신 중국 정부는 공산당 집안 출신의 6살 난 기알첸 노루부를 11대 판첸라마로 내세웠다. 아무튼 판첸라마 4세의 제자로 들어간 갈단은 그 아래서 5년 간 수업했다.

1,662년 판첸라마 4세가 92살의 나이로 죽자 라싸로 이주해 달라이 라마 5세를 스승으로 모셨다. 여기에서 5년 간 더 수업한 갈단은 10년 만에 준가르 지역으로 돌아왔다.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승복과 진주로 만든 염주 등을 주면서 황교의 이익에 맞는 생활을 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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