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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청해를 장악한 구시 칸은 오이라트의 세력을 계속 그 곳으로 불러 들였다. 그렇게 결집시킨 군사력을 바탕으로 구시 칸은 1,639년 동티베트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듬해는 운남(雲南)지역까지 포함한 동티베트지역(현재의 사천성 서부지역)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구시 칸은 홍교는 물론이고 황교를 제외한 다른 종파, 즉 샤가파와 조낭파는 물론 티베트의 무속신앙인 ‘본포’를 따르는 무리까지 모두 제압했다. 1,641년 구시 칸은 티베트의 중앙을 거쳐 서티베트의 홍교 지원 세력 근거지까지 함락시킨 데 이어 티베트의 주요 요새를 모두 수중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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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8 나한상 (승덕 보녕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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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포탈라궁]
이 궁전은 이름은 널리 알려진 포탈라 궁이다. 이 궁전은 구시 칸이 홍교를 제압하고 달라이 라마가 주도하는 황교의 권위를 확보한 뒤인 1,645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 궁전을 짓는 데는 무려 50년 이상이 걸려 건물은 1,696년에야 완공됐다.
그렇게 세워진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지배를 뒷받침하는 상징물이 됐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보살 왕 사상에 가장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7세기 티베트 통일 왕조의 시조로서 티베트 불교를 들여온 송첸감보왕의 전생(轉生)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포탈라도 과거 송첸감보의 홍산 궁전이 들어섰던 자리에다 세웠다. 포탈라는 불전(佛典)에서 말하는 관음보살의 성지(聖地)를 말한다. 그 이름대로 이 궁전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성지가 됐다.
▶송첸감보왕의 전생 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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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송첸감보와 부인상(티베트 불교 창시자)]
연꽃은 관음보살을, 법륜은 전륜성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 초상화는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인 전륜성왕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티베트를 방문하지 못해 이 포탈라 궁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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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보타종승지묘(승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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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보타종승지묘 내부]
▶달라이 라마 정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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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달라이 라마 5세와 순치제(동등한 위치)]
그래서 1,655년 죽을 때까지 그는 ‘티베트인들의 칸’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구시 칸이 죽은 데 이어 섭정까지 숨지자 달라이 라마 5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실질적인 티베트 통치권까지 손에 넣게 된다. 구시 칸이 죽은 뒤 청해 호쇼트부에서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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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여성 타라스 프레스코화]
▶몽골에 우월적인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5세는 이후 여러 가지 문제를 초월적인 입장에서 처리했다. 우선 몽골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분쟁이 일어난 지역에서 발생한 난민을 처리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지도자들에게 칭호를 내려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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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5백 나한상]
이와 함께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와 연계된 정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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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마르바야스갈란트 사원(몽골 두 번째 중요 사원)]
바가바이스가 아들 덕분에 사후에 칸의 호칭을 얻게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오치르트와 함께 오이라트에서는 준가르의 갈단과 토르구트의 아유기가 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런데 칸의 칭호를 갖고 있던 한사람이 죽은 후에야 차례로 칸의 지위를 얻었다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의 칸이라는 의미로 이들에게 칸의 칭호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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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티베트불교 사원 지붕의 비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