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토르구트 정착지 ]

[사진 = 서부 몽골의 사냥꾼들]
노가이가 망구트 부족을 중심으로 크리미아 반도와 카스피해 주변의 스텝 지역에 새 터전을 마련하면서 이 부족들을 노가이 타타르라고 불렀다. 그래서 노가이라는 명칭은 민족보다는 노가이 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진 = 카자흐 초원 유목민]
이후 노가이인의 일부는 토르구트 진영으로 흡수되고 대부분은 볼가강을 건너 크리미아 타타르의 본가로 흘러들어 갔다. 토르구트의 지도자 코 오르로크는 노가이인들을 뒤쫓다가 카프카즈(Kavkaz) 산 속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했다.
▶오이라트와의 관계 되살린 토르구트
비록 지도자 코 오르로크가 전사했지만 그 아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이어가면서 토르구트는 카스피해 연안의 드넓은 초원에서 새로운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코 오르로크에 이어 지도자의 자리를 맡은 아들 다이칭은 근처에 거주하던 타타르인과 투르크인들을 모두 장악하거나 카프카즈(코카사스:Caucasus)쪽으로 내쫓아 버리고 그 지역에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 = 러시아. 폴란드 전쟁(17세기 초)]
그래서 오이라트 연합의 집회가 있을 때나 군대 동원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먼 볼가강변에서 대표나 병력을 오이라트로 파견했다. 또한 서로의 연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의 혼인 관계도 유지해갔다. 토르구트를 이끌고 이동했던 코 오르로크의 아들인 다이칭은 호쇼트부 쵸굴의 사위였다.
또 딸은 도르베트부의 다라이 타이시에게 시집갔다가 그가 죽자 그의 아들과 재혼하기도 했다. 그래서 토르구트 외에 호쇼트 등 다른 부족의 사람들이 일부 볼가강변으로 옮겨와 살기도 했다.
▶러시아와 좋은 관계로 출발
1,630년대에 볼가강변으로 이주한 토르구트는 1,770년대 그 곳을 떠나 다시 오이라트의 땅이었던 일리 지역으로 돌아갈 때까지 140여 년 동안 볼가강 근처 카스피해 북쪽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그 때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칼미크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토르구트가 러시아 정부와 좋은 관계로 출발했다는 것도 초기 정착을 용이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가 됐을 것이다. 토르구트가 볼가강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1,630년대는 러시아에서 로마노프(Romanov)왕조가 출범을 한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사진 = 미하일 로마노프 황제]
그런 때 토르구트가 들어와 남쪽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인 노가이 타타르를 크리미아 쪽으로 밀어낸 것은 러시아로서는 반길만한 일이었다.
▶토르구트에 호의 베푼 러시아
그래서 모스크바 정부는 토르구트가 그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것을 환영했다. 모스크바는 특히 토구르구트가 가지고 있는 군사력, 날랜 기마병을 여러 나라와의 분쟁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러시아 도시에서의 교역권을 허가해 줬다. 그리고 크리미아를 공격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정부의 희망대로 토르구트, 즉 칼미크는 크리미아 지역의 노가이인들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목초지를 넓히기 위해 생존권 차원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러시아와 동맹 맺은 칼미크

[사진 = 스쩬까 라진 아스트라한 장악]
라진의 반란 세력은 칼미크의 거주지 근처인 카스피해와 볼가강, 우랄강 지역에서 일어나 1,670년 아스트라한을 점령한 뒤 모스크바 쪽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미크는 이 반란의 움직임에 발을 담그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쩬까 라진의 난이 평정된 지 2년이 지난 뒤인 1,673년, 칼미크는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됐기 때문에 칼미크의 기마대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이 동맹에 대해 러시아는 칼미크는 러시아의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절차였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칼미크 측의 생각은 달랐다. 그 것을 자신들이 그 지역의 지배자라는 것을 러시아에게 인식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진 = 칼미크 지도권 이전]
1,677년부터 4년 간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칼미크는 러시아의 편에 섰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에서 계속 사절단을 보내 많은 선물을 안겨줬기 때문에 칼미크는 중립 입장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1,697년 칼미크의 아유기는 다시 러시아와 새로운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사진 = 뾰뜨르 대제]
▶뽀뜨로와 아유기의 만남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발트 연안을 장악해 서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해로를 연 뒤 대(大)러시아제국의 출범을 선언했다. 그 다음해인 1,722년 뾰뜨르대제는 볼가강변의 아름다운 도시 사라토프(Saratov) 근처에서 칼미크의 아유기와 만났다.
2명의 자식과 5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아유기는 볼가강변에서 러시아측 인사의 영접을 받고 뾰뜨르 대제에게 안내됐다. 뾰뜨르는 강변까지 나와 아유기를 맞이한 뒤 그를 자신의 배로 안내했다. 아유기의 처 역시 황후의 영접을 받았다.

[사진 = 캐서린 왕후(뾰뜨르 아내)]

[사진 = 에까쩨리나 여제 ]
어쨌든 이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오이라트와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 과정은 다시 오이라트로 돌아가 살펴보면서 짚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