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포 영장 내미는 경찰관 홍부장을 감화시키다
남자현의 무용담 중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는 홍순사 에피소드이다. 이 이야기는 잡지 <부흥>에 나온다.
“왜적들은 선생을 붙잡으려고 대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선생이 호탄현 지방을 지나다가 홍순사라는 자에게 걸렸다. 선생은 그를 향하여 책망 절반 설유(說諭, 설득과 회유) 절반으로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 리 타국에 와서 애씀은 그대와 우리의 조국을 위함이거늘 그대는 조상의 피를 받고 조국의 강토에서 자라나서 어찌 이같은 반역의 죄를 행하느냐?’ 홍순사는 그 심장과 골수를 찌르는 선생의 일언일구에 감동되어 그 잘못을 사과하고 도리어 갈 길을 인도하여 여비까지 70원을 내어 드리니 이로써 선생의 강한 의지와 크나큰 인격의 감화력이 어떠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홍부장은 자신의 집 골방에 남자현을 가두고 매우 조심스럽게 심문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이미 만주 일대에서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는데다가 그녀의 인격적 행동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기에, 속으로 은근히 외경(畏敬)을 지니고 있었던 듯 하다. 그때 남자현은 홍에게 위에서 소개한 ‘심장과 골수를 찌르는’ 설득을 한다. 홍이 그녀를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홍을 심문하는 것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남자현의 말을 듣고 있던 홍부장은 가만히 서류철 하나를 내민다. 거기엔 유가현 경찰서에서 발부한 체포영장이 들어 있었다. 남자현은 “나 하나를 잡아넣는다고 이 민족이 사라질 것 같은가. 나는 기꺼이 잡혀갈 수 있지만 자네 마음 속에 내보인 내 정신은 결코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체포하는 것은 조선인인 자네 스스로를 체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꼬박 밤을 샌 뒤 새벽이 밝아왔다. 홍부장은 그녀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고 식모 아이를 불러 “이분은 나의 친척 어른이시다. 길을 잘 안내해드리려무나”라고 말하고 남자현을 위하여 여비 70원을 준다. 일본 경찰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간부를 설복시켜 ‘체포’의 곤경에서 당당히 풀려나는 이 모습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를 짐작하게 한다.
# 일제 농간으로 독립운동 지도자 47명이 중국 관헌에 검거
남자현은 독립운동 진영의 조직 화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런 가운데 여성으로서 독립군 자금 모집책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녀는 채찬(蔡燦)과 함께 활동한 흔적이 보인다. 채찬은 오래 전에 돌아간 남편 김영주와 동문 수학한 친구이며 의병활동의 동지였다. 두 사람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경을 넘어 조선에 잠입하기도 했다. 당시 이들이 조선의 어디에서 활동했는지는 상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상당한 금액의 독립군 지원금을 받아내 만주로 귀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남자현의 존재감이 뚜렷해진 것은 1927년 2월 말의 길림(吉林)사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길림사건은 도산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독립운동 핵심 지도자 47명이 무더기로 중국 관헌에 검거된 사건을 말한다. 일본 경찰은 이들을 중국으로부터 넘겨받기 위해 총력전을 펴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될 경우 조선의 독립운동 진영은 한꺼번에 괴멸될 수 있는 위기국면이었다.
당시 민족유일당(唯一黨) 운동이 불붙고 있었다. 유일당운동은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이념 차이를 극복하려했던 일종의 좌우합작 운동이었다. 그 선두에 안창호가 있었다. 그는 1926년 10월 북경에서 좌파와 연합하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결성함으로써 유일당운동에 불을 지폈다. 1927년 2월15일 국내에서 신간회가 결성되는 것도 그 흐름 속에 있다.
# 나석주 추도식에 강연을 하던 안창호 구속 충격
안창호는 만주에서도 이같은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길림을 방문한다. 그곳에서는 만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무장단체 통합과 대독립당 건설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길림성 조양문(朝陽門) 밖에 있는 대동공창(大東工廠)에서 열린 의열단 나석주(羅錫疇)의 추도식에서 500여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민족운동의 장래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나석주는 그 전해인 1926년 12월28일에 동양척식회사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한 의열단원이다. 이날 안창호는 만주의 리더들을 만나 시국을 토론했다.
그런데 정보를 파악한 일제 경찰이 중국 길림성 군당국에다 이 모임을 공산주의 집회라고 거짓으로 밀고하는 일이 일어난다. 일본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구니모토(國友)를 파견해 중국 헌병사령관 양우정(楊宇庭)에게 조선공산당원 수백명이 집회를 열고 있다고 말하고 체포를 의뢰했다. 양우정은 병력을 동원해 현장을 급습,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고 이들 중 47명을 길림독군서(吉林督軍署)에 구속했다. 여기에는 안창호를 비롯해 김동삼, 오동진, 고할신, 이철, 김이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현과 양녀인 이장청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여성이라는 점 때문인지 구속에서 제외됐다.
# 당시 현장에 있던 남자현, 옥중 안창호 밀명 받고...
구니모토는 수감된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에 인계해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이 이들을 넘길 경우, 독립운동은 치명타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일본에 넘어가는 일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발 벗고 나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무렵 집회 현장에 있었지만 체포되지 않았던 남자현이 자청해서 안창호의 옥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안창호는 그녀에게 밀명을 내린다. “정미소를 하는 이기팔 선생을 찾아가시오. 그 정미소를 연락처로 정하고 현 사태를 상해 임시정부에 연락하도록 하시오.” 남자현은 이기팔을 찾아 협의한 끝에 길림사건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일을 시작한다.
# "조선 독립군 감금은 중국 품위 떨어뜨려" 여론 조성해 안창호 구출
임정과 연락을 취해 중국 당국과 교섭을 시도하도록 한다. 이같은 활동에 힘입어 이 사건이 중국의 신문에 보도된다. 이후 중국 사회의 정치인과 사회단체 인사들, 그리고 학생들이 “외국의 독립운동자들을 감금하고, 또 그들을 일제에 넘기는 것은 국가적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공격하고 나선다.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대원수(大元帥) 장작림(張作霖)이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실로 조마조마했던 사건이었다. 길림사건이 해결되자 만주교민들은 그녀를 ‘안창호를 구한 숨은 공로자’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