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 의병의 '미망인'이 적지 않은 나이에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행을 자처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동독립기념관 김희곤 관장)
“남자현 여사는 항상 죽은 남편의 피묻은 옷을 갖고 다녔다고 합니다. 중국인 노파로 변장해 장춘으로 가다 일본 영사관 헌병에 체포됐을 때도 지니고 있었지요. 원수의 밥은 사절이라며 끝까지 항거하다 기력이 쇠진해 숨을 거뒀지요.”(박용옥 전성신여대교수)
“조선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라. 이로써 나라를 망하였거늘 조국광복을 운동하는 그네들이 또 외지에 가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북파니 기호파니 안파니 이파니 하여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 남만 화인현 등지에는 동족간에 피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해임시정부에서 김리대씨가 특파되어 화해공작에 애썼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선생은 이 일을 크게 근심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한주일 동안 금식기도 하고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관계자들을 소집하였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소위 독립운동 간부들은 누구나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하는 피의 설유에 각각 잘못을 회개하고 완전한 쌍방간의 화합이 성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환인 관전 등지의 주민들은 그 은공을 감사하여 곳곳마다 나무로 비를 세워 그 공덕을 표창하고 만주 각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선생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잡지 <부흥> 1948년 12월호,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
“아버지(김성삼)와 할머니(남자현)가 길 가다가 왜놈의 밀정을 만났답니다. 할머니가 아버지께‘보자기 있느냐’고 하더니 옆의 가지밭에 들어가 가지를 하나 따 보자기에 싸서 마치 총구인 것처럼 밀정의 등에 들이대고‘손들어’하더니 집으로 끌고 갔답니다. 할머니는 밀정이 두시간 만에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자 내보내 주었답니다.” (손자 김시복)
“60년대초 윤보선 대통령 때 건국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어요. 중장·복장·단장의 세 급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여자로서는 최고였지요.”(손자 김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