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나이만 차강 게르(칭기스칸 가묘)]

[사진 = 소르칵타니 사당]

[사진 = 칭기스칸 가묘의 게르]
▶40대 만두하이, 10대 다얀칸과 혼인

[사진 = 영화 ‘만두하이’]
전투의 결과는 그녀의 기대대로 대승이었다. 다얀칸이 15살이 됐을 때 만두하이는 처음으로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고 원정에 내보냈다. 1481년 서몽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자 만두하이는 애초의 계획대로 다얀칸과 결혼했다. 만두하이가 42살, 다얀칸은 17살이었다.
서른한 살과 여섯 살 로 만나지 11년 만이었다. 25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유목 사회에서는 손아래 남자가 손위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문제가 아니었다.
▶세쌍둥이 낳은 만두하이

[사진 = 만두하이 민화]
쌍둥이를 낳은 경우가 세 번이었다. 첫 번째 쌍둥이를 낳은 뒤 그녀는 두 아들에게 토로 볼로드(Toro Bolod)와 울루스 볼로드(Ulus Bolod)라는 이름을 주었다. ‘강철 정부’ 와 ‘강철 국가’의 의미였다. 이들 일곱 명의 아들과 다른 후비에게서 태어난 4명 등 모두 11명의 다얀칸 아들들이 이후 칭기스칸 가계의 새로운 몽골 민족을 탄생시키게 된다.
▶35년 전장 누빈 만두하이

[사진 = 다얀칸]
아직 20대 초반의 다얀칸이 만두하이 없이 몽골을 이끌고 가기에는 군사적 경험이나 정치적 경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하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그녀를 구해냈다. 충성스런 전사들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그녀는 한 달 뒤 다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35년 동안 전장을 누볐던 만두하이는 다얀칸이 남부 원정을 떠난 뒤 야영지에 머무르다 텡그리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칭기스칸의 사당 앞에서 한 맹세를 모두 지켰다. 7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은 것을 보면 사당 앞에서의 맹세는 그녀를 칭송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옛 몽골 영광 재현한 여걸
칭기스칸의 아들과 손자들은 상당부분 정주권 문화에 안주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만두하이는 말위에서 정복한 나라는 말위에서 다스려야 한다는 유훈을 철저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임신과 출산 병고 등 어떤 것도 그녀의 군사 활동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만두하이는 쿠빌라이 이후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방식을 되살려 냈다.
만두하이가 떠났지만 다얀칸은 이미 강인하고 영명한 군주로 거듭나 있었다. 그래서 만두하이가 부활시킨 몽골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얀칸 시절의 몽골제국은 북쪽의 시베리아 툰드라지역과 바이칼호수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고비사막을 넘어 황하근처와 오르도스지역까지 차지했다.
또 동쪽으로는 만주지역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초원지역까지 확대돼 옛 몽골제국의 영광을 재현시켰다. 다얀칸은 만두하이 손에 자라 어린 시절에는 말위의 바구니 속에서 전장을 누볐지만 동서 몽골을 통합하는 어엿한 군주로 거듭났다.
▶남편을 역사에 남을 칸으로 만들어

[사진 = 몽골의 여인들]
그런 점에서 흔히 만두하이를 칭기스칸의 모친 호엘룬에 비유하곤 한다. 세계를 정복했던 기마 민족의 사회가 얼른 생각하면 남성 우위의 사회일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의 역할을 능가한다. 칭기스칸이 평생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인물이 어머니 호엘룬이었던 것도 그 것을 말해주는 한 사례다. 그래서 용맹한 전사는 어머니의 손으로 길러지고 그러한 어머니가 있어 세계정복이 가능했을 것이다.
▶"여성 칭기스칸 만두하이"

[사진 = 다얀칸 취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부 학자들은 만두하이는 국가 경영 측면에서 칭기스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칭기스칸이 3백여 년이 지난 뒤 전생사상에 따라 여자의 몸으로 환생한 것이 바로 만두하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두하이를 여성 칭기스칸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사진 = '어머니에게' 부르는 몽골 걸그룹 '이모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