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자주국가 자존심 추락
[사진 = 몽골군 사열대]
인적 물적 피해와 함께 나라의 자존심까지 크게 추락했다. 여러 가지 용어나 관제가 격하됐다. 몽골은 고려의 행정관제가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아래 단계로 낮추라는 압박이었다. 그래서 충렬왕 때인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추밀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격하시켰다.
6부도 통합돼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등으로 바뀌었다. 왕의 묘호(廟號)는 조(祖)나 종(宗)에서 왕으로 떨어졌다. 또 왕의 시호 앞에는 충자를 일괄적으로 붙이도록 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래서 임금의 명을 널리 선포한다는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바뀌었다. 왕실의 용어도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격이 낮춰진 말로 바뀌었다.
나라의 관제도 원나라의 관제와 충돌되지 않게 한 두 단계씩 낮춰 조정했다. 이와 함께 몽골 직제의 영향으로 생긴 관직도 적지 않았다. 몽골식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나 매를 잡는 일을 업무로 하는 응방(鷹坊), 몽골어를 배우게 하는 통문관(通文館)등이 그 것이었다. 또 공주를 따라와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겁령구(怯怜口)나 사속인(私屬人) 등은 관직 이상으로 힘을 행사했다.
[사진 = 삼국유사]
[사진 = 일연스님]
그런 와중에서 민족성을 고취시키고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면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일이었다. 이를 통해 고려민족의 정통성을 일깨운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 그 상황에서 자위할 수 있다면 몽골제국이 넓은 지역을 정복한 뒤 대부분 지역을 직접 다스렸지만 고려에 대해서는 간접 지배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나마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 사회 변화 가져온 몽골 풍속
[사진 = 만두가게 몽골인들]
몽골지배는 사회 풍습에서도 변화가 적지 않았다. "쌍화점(雙花店:만두집)에 쌍화(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回回)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점포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점포 사환) 네가 퍼뜨린 말이라 하리라. (소문을 들은 다른 여인들이)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잘 알려진 고려가요 쌍화점이다.
13세기말 충렬왕 때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가요를 현대적인 해석으로 바꾼 것이다. 몽골지배 아래 있었던 당시 사회상을 풍자한 가요를 4연 가운데 1연만 소개했지만 전체 내용을 보면 당시 사회 각 계층의 문란한 성도덕을 풍자하고 있다.
▶ 고려 때 유입된 만두․소주․설렁탕
설렁탕과 만두, 소주 등이 이 시대에 들어 인기를 끈 음식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쌍화는 몽골의 만두를 일컫는다. 만두는 오래 전부터 몽골 유목민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이다. 몽골인들은 최대명절인 차강사르(설날)가 되면 여러 가지 만두를 만들어 먹고 손님을 대접한다. 찐만두인 ‘보브’와 군만두인 ‘호쇼르’, 그리고 물만두인 ‘반시’가 그것이다. 몽골인들은 평소에도 만두를 즐겨 먹는다. 몽골 최대의 명절인 나담 축제가 열리면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호쇼르는 불티가 나게 잘 팔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몽골인들이 고려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고려에는 만두점까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회아비는 이슬람인을 일컫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점이나 당시 사회상 등을 감안하면 몽골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요는 몽골의 지배와 함께 유목민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성적 개방 풍조가 고려에 만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몽골의 상인을 비롯한 외국의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영빈관(迎賓館) 등 외국인 전문 객관도 늘어나 바깥의 풍습이 적지 않게 고려로 흘러들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 족두리․연지 등도 몽골 풍습
몽골 지배 초기 충렬왕은 대도에서 생활하면서 익숙해진 몽골식 변발과 호복을 신하들에게 강요했다. 그는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맞이할 때도 신하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다. 그리고 변발을 하지 않은 신하는 환영식장에서 내쫓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몽골 출신 왕후와 그녀를 따라온 사속인들 그리고 고려에 머물고 있던 몽골 군인들이 몽골 풍습을 만연시켰다.
[사진 = 족두리]
그 때 들어온 몽골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여자 머리에 올리는 족두리는 몽골여인의 외출용 모자로 몽골의 황태후가 고려에 시집간 공주에게 선물한 것이 결혼식 때 신부가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진 = 몽골의 황후]
역시 결혼식 때 신부 두 볼에 찍은 연지도 몽골서 건너온 것이다. 유목민 여인들은 흉노 때부터 지금 중국 섬서성에 있는 연지산에서 딴 홍란이라는 꽃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화장을 했다.
[사진 = 연지 바른 신부]
그 것이 고려로 전해져 신부 화장에 사용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몽골궁정에서 왕과 왕비 등을 부르는 호칭 ‘마마’나 세자빈을 부르는 ‘마누라(마노라)’ 임금의 음식을 뜻하는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도 모두 몽골의 궁정 용어였다가 우리말이 된 사례들이다. 옷고름에 차는 장도칼도 몽골에서 전해진 풍습이다.. 장사치, 벼슬아치 등 명사의 어미에 치를 붙이는 것도, 소주나 설렁탕 같은 음식도 모두 몽골의 고려지배가 남긴 것들이다.
▶ 몽골 영향 가장 많았던 제주도
[사진 = 제주 항파두리성터]
특히 몽골군이 주둔했던 제주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바리, 구덕(요람), 허벅(물 항아리)등의 용어와 함께 말을 사육하는 용어에도 몽골 언어와 비슷한 것이 많다. 몽골 풍속이 고려에 전해진 것과는 반대로 공녀나 환관 등을 통해 고려의 풍속이 몽골로 전해진 것도 있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 부른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한류라 할 수 있다.
[사진 = 고려후기 복식]
허리선까지 내려오는 치마저고리 등 복식을 비롯해 전통한과인 고려병과 고려다식, 고려조청 등 음식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풍속이 몽골의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고려와 몽골의 교류가 남긴 유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