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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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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시데발라(英宗)]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선왕의 존재를 가시처럼 여기던 몽골황실의 고려인 출신 환관 바얀투구스(伯顔禿古思)가 충선왕을 모략했다. 바얀투구스는 충선왕이 자신에게 벌을 내린데 앙심을 품고 충선왕을 모략한 것이었다. 충선왕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전답과 노비를 강탈하는 전횡을 저지른 바얀 투구스를 벌을 준 적이 있었다. 모양은 그랬지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불경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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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왕후관련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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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충선왕 유배길]
▶ “밥은 찐보리에 거처는 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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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제현]
"티베트는 고국에서 만 여리나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도적은 때 없이 나타나며 천막을 치고 들에서 잡니다. 기루한 걸음으로 반년 만에 도착하는 먼 곳입니다. 밥은 찐보리 가루고 거처는 토굴이라 길가는 사람이 듣고도 눈물을 흘리겠거늘 하물며 그의 신하된 자는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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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티베트 사캬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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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감숙성 난주]
이순 테무르는 카말라의 아들이니 충선왕에게는 처남이었다. 충선왕은 당연히 방면돼 대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생은 얼마 되지 않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쉰 한 살의 나이였다.
▶ 여인들을 사랑한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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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숙비발원 수월관음도(일본 경도 泉屋博古館 소장)]
하지만 이 또한 그가 몽골의 풍습에 젖어 살아온 절반이 몽골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것은 몽골에서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별 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았던 과부 허씨(中贊 허공의 딸)를 부인으로 삼아 순비(順妃)로 책봉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과부를 왕비로 삼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충선왕의 여성관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재혼을 한 두 여인인 숙비와 순비는 사이가 유독 나빠 한 연회 자리에서 두 사람 모두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시기심이 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연꽃과 관련된 몽골 처녀
왕이 되기 전에는 공녀로 끌려갈 처녀를 눌려 앉혀 세자빈으로 삼기도 했다. 그녀가 정비 왕씨로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의 딸이었다. 그녀는 몽골 황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 한다고 말해서 공녀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1289년에 충선왕과 결혼해 세자빈이 됐다. 고려에서는 동성동본간의 결혼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몽골은 이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몽골황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숙비의 경우와 달리 이 경우는 고려의 풍습에 따랐다. 결국 동성동본간의 혼인을 금지하라는 몽골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충선왕은 1308년 이를 받아들여 교서를 통해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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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북경 북해공원 연꽃]
▶ 소설 소재로 흥미 있는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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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포스터 ]
같은 제목의 작가 김이령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 멜로 사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드라마는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당시 사랑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극의 사랑얘기가 그렇듯이 여기에 나오는 얘기도 거의 대부분 허구다. 소설의 작가가 얘기한대로 기록되지 않은 충선왕 삶과 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냈던 세자시절의 사랑과 갈등을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개혁의지가 남달랐던 충선왕은 난세가 아니었다면 통치자로서 자질을 보여줄 수 있었던 재목이었지만 고려의 왕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것은 전적으로 몽골의 지배 아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세 가지 직책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고려왕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피가 고려와 몽골의 절반이었던 것처럼 고려의 반쪽 임금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평생 동안 충선왕을 섬겼던 왕후는 상복 차림으로 충선왕의 시신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뒤 평생토록 초하룻날과 보름날 충선왕의 덕릉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왕후는 충선왕이 죽은 지 20년이 돼도 시호를 받지 못하자 많은 재산을 들여가며 원나라 황실에 청해 시호를 받아 내기도 했다. 고려사 열전은 왕후는 강직하고 장중한 인물로 하찮은 벼슬아치에게도 예를 다해 대접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충선왕에게 왕후는 최상의 충신, 몽골로 말하면 너흐르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