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39] 기황후는 어떤 위치에 있었나?

2018-01-1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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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살구 같은 얼굴에 복숭아 뺨"

[사진 = 원사 후비열전]

"그녀는 영악한 성품에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여린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에 기록된 기황후에 대한 평가다. 적어도 그녀가 아름답고 총명한 고려 처녀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대도에서는 고려 여인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고려 여인을 처첩으로 들이지 않으면 명가(名家)로 대접받지 못할 정도였다고 경신외사(庚申外史)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경신외사는 원말(元末) 명초(明初)를 살았던 권형(權衡)이 토곤 테무르시대를 기록한 야사다.
 

[사진 = 드라마 ‘기황후’ 포스터]

그 고려 여인가운데서도 아름답고 총명한 기여인을 자주 접하게 된 대칸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더욱이 기씨가 토곤 테무르의 처소에서 시중을 들기 시작한 것이 대칸으로 즉위한 직후의 일이었으니 고려 여인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을 것이다. 당시까지 감수성이 풍부한 10대에 불과했던 대칸에게 고려에 서 지낸 시절에 대한 향수는 곧바로 기여인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순제(토곤 태무르)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 후비열전의 이 같은 기록이 기 씨에 대한 대칸의 총애를 말해주고 있다.

▶ 질투 때문에 숱한 곤욕
대칸의 눈 안에 든 기씨는 얼마 되지 않아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황후인 타나실리(荅納失里)의 질투 때문에 그녀는 숱한 곤욕을 치렀다. 모욕은 물론 매질을 당할 정도로 학대를 당했지만 기씨를 좌절하지 않고 대칸의 등 뒤에 숨어 어려운 시기를 꿋꿋하게 견뎌냈다.
 

[사진 = 토곤 테무르]

그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335년, 토곤 테무르가 대칸에 취임한 지 2년 뒤 황후의 형제들이 다른 황족을 대칸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발각됐다.타나실리는 토곤 테무르 혜종이 즉위할 때까지 원나라 조정을 쥐고 흔들었던 엘 테무르의 딸이었다.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즈음 갑자기 사망했다. 의문의 죽음이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혜종은 즉위 후 죽은 엘 테무르의 동생 사둔(橵敦)과 자신을 옹립하는 데 공이 큰 바얀을 승상으로 삼았다. 특히 바얀을 중서우승상으로 발탁해 진왕(秦王)에 봉함으로써 엘 테무르 가문을 견제하려 했다. 사둔이 죽고 난 뒤 권력의 추가 바얀쪽으로 기울자 엘 테무르의 두 아들이 바얀을 죽이고 혜종을 폐하려는 역모를 꾀했다. 1335년 6월 이들은 결사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난입했지만 이를 사전에 간파한 바얀이 이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쿠데타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이를 주도했던 황후의 오빠를 비롯한 가족들은 처형되고 황후 타나시리도 유폐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황후가 죽자 토곤 테무르는 궁녀 기씨를 정후(正后)로 앉히려했다. 하지만 역모사건의 처리를 맡았던 실력자 바얀을 비롯한 귀족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몽골제국의 황후 자리는 전통적으로 옹기라트 가문에서 이어 왔는데 미천한 고려출신 궁녀를 그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 아들 출산으로 확고해진 지위
치세 전반의 대칸은 사실상 군벌 세력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코실라를 죽인 뒤 권력을 장악했던 그들의 힘에 대적할 만한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평균 1년도 채 되지 못한 기간에 쿠데타가 일어나 대칸이 바뀌는 일이 거듭됐으니 토곤 테무르로서도 언제 자신이 그 자리에 밀려나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대칸은 살아오는 동안 터득한 지혜로 자신을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이 있으면 물러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때가 와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직접 나서거나 다른 세력을 키워 제압하는 방법을 썼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대칸은 결국 1337년 옹기라트 가문의 여인을 새 황후로 맞아 들였다.

그녀는 바로 실력자 바얀의 딸인 바얀 코톡토(伯顔忽都) 였다. 비록 황후에 오르지 못했지만 궁녀 기씨는 여전히 대칸의 사랑을 받으며 2년 후 에는 토곤 테무르의 아들을 낳게 된다. 나중에 몽골 땅에서 북원제국의 첫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난 것이다. 아들의 출산으로 그녀의 지위는 점차 확고부동해지기 시작했다.

▶ 제 2황후에 오른 기여인

[사진 = 토곤 테무르(惠宗, 順帝)]

그 상황에서 다시 역모사건이 터지면서 기씨에게 거듭 기회가 찾아왔다. 토곤 테무르의 아버지인 코실라를 죽이고 대칸에 올랐던 톡 테무르의 부인, 즉 대칸의 숙모는 당시 태후의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실력자 바얀과 손잡고 자신의 아들을 대칸의 자리에 올리려고 시도한 또 한 차례의 쿠데타 음모가 사전에 발각된 것이다.

하지만 바얀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해 토곤 테무르가 바얀의 조카인 톡토(脫脫)를 내세워 바얀 일파를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이 사건으로 태후 모자와 바얀이 축출되면서 대칸의 힘이 어느 정도 생겼다. 토곤 테무르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신하들도 대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 여인을 제2 황후로 받아들일 것을 주청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대칸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고려 정부가 기 여인을 황후에 책봉하도록 로비활동을 벌인 것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 몽골 황후로서 자질 연마

[사진 = 기왕후 초상화]

1339년 그녀는 몽골제국의 황후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울제이투 코톡토(完者忽都)카툰’, 즉 ‘아름답고 복 있는 황후’라는 뜻이었다. 제 2의 황후이기는 하지만 몽골족이 아닌 고려 여인으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기황후는 이후 25년 동안 제 2황후의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인 출신 환관 등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특히 몽골제국의 황후로서 자질을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녀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 몽골 황후로서 인정을 받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

[사진 = 북경 중남해지역]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주했다. 그 자리는 북경의 중남해지역으로 지금은 공산당원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지나면서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알맞은 교양을 갖추기 위해 역대 왕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사서(史書) 등 여러 가지 책을 읽었다.
 

[사진 = 고용보 추정도]

또 고려에서 미녀들을 골라 데리고 와 고관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후의 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자신과 대칸을 맺어준 심복 고용보를 자정원사( (資政院使)로 삼았다. 이 자정원에는 고려 출신 환관은 물론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의 고위 관리까지 참가해 강력한 정치세력 집단이 만들어졌다. 이 자정원은 사실상 기황후의 재정적 기반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녀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지면서 제 2 황후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위세는 제 1황후를 훨씬 능가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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