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개봉한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은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 도중 사망하고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 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김윤석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을 연기했다.
“‘1987’은 정말 잘 만들고 싶었어요. 이 작품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컸죠. 장준환 감독님에 대한 끝없는 믿음이 있었고 시나리오도 매력적인 데다가 이 이야기가 극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컸어요. 사명감이나 이런 걸 내세우는 게 미안할 정도로요.”
독재정권이 빚어낸 폭력의 시대. 그 초상을 완성한 김윤석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게 박처장을 연기했다.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 박처장을 처음 만났을 때, 김윤석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처음 본 소감에 관해 묻자 그는 감상보다도 작품에 대한 구조로서 박처장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취했다.
“극의 중심을 잡는 것이 안타고니스(antagonist, 적대자)잖아요? 악역이 중시에 있고 선한 인물들이 주변에 있는 것이 특이한 구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적 구조로서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봤죠. 실제 그 사건도 이런 방식으로 알려지고 밝혀진 것이니까 영화와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타고니스가 극의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구조로서도 배우로서도 특이한 경험임이 분명했다. 김윤석은 “누군가 가운데서 버텨줘야만 그가 넘어질 때 더 크게 와닿는 것”이라며, 박 처장이 더욱 거대하고 악독한 인물로 느껴지기 바랐다고 털어놨다.
“‘타짜’ 아귀 같은 캐릭터는 시쳇말로 놀면 돼요. 개인 자체의 캐릭터가 성격으로 나오는 건데 ‘1987’ 속 박처장은 권력의 어두움을 집대성한 캐릭터잖아요? 이 사람에게 주어진 상징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그런 디테일을 놓치고 가면 안 되니까. 거대한 조직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품을 시작하고 홍보를 진행하는 가운데서도 ‘1987’에 대한 김윤석의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故 박종철 열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1월 14일이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에요. 매년 전국에서 행사하는데 부산 광복동 행사 때 찾아갔어요. 아버님과 누님,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런 작품을 준비한다며 예의를 차려 허락을 구했죠. ‘제가 굉장한 악역을 한다. 이래야 영화가 산다’고 하니 형님께서 ‘후유증이 남지 않겠냐’며 걱정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는 당시 논란이 됐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대사를 언급하며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설명했다.
“당시에도 연극에 많이 사용될 정도로 아이러니한 대사였죠. 시대를 그대로 담아낸 거예요. 그 장면을 연기할 때 현장에서는 웃음이 많이 터졌었어요. 우스울 수밖에 없죠! 기가 찬 대사니까요. 미묘하죠? 제가 해놓고도 매끄럽게 말을 잇지 못하니까 ‘엉?’하는 이상한 추임새도 넣은 거예요. 즉흥적으로 나온 건데 본편에도 사용되었더라고요.”
김윤석은 박처장의 내실부터 외형까지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박처장으로 하여금 그 시절 독재정권 및 악의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장 감독과 이런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영화 말미, 박처장이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한병용을 회유하는 장면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모른다고. 한병용을 회유하기 위한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낸 거잖아요? 그게 진짜일지 거짓말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장 감독은 ‘선배님은 진짜처럼 해주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사람을 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크고 작은 점들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박 처장의 전사는 물론 그의 공백들을 채워나가는 노력은 더욱 그를 악랄하고 무시무시한 인물로 만들었다.
“외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마우스피스도 껴보고 이마도 깎았죠. 실존 인물이 거구기 때문에 패드 같은 것도 많이 넣었어요. 사투리 연습도 무진장 하고요. 그분이 함경도 출신이 아니라 평남 출신이라 사투리 선생님을 만나 연습을 많이 했어요. 무조건 연습이에요. 낯선 언어를 받아들이는 건 오로지 연습뿐이죠.”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고문하는 장면은 없어서 다행”이라는 김윤석. 그는 대공 형사 역할과 빛의 반대편에 섰던 역할에 대한 고충을 대신해 전하기도 했다.
“빛의 반대편에 섰던 역할을 하신 분들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누구 한 명이라도 빠지면 영화가 존재할 수 없거든요. 다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연기 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문성근 선배나 우현 씨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인데 어둠 속으로 와서 연기해냈다는 게 대단하죠.”
아픈 역사를 체화해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에게 어떤 의미일까? 김윤석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라며 담담히 답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게 돼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책임감이라고도 볼 수 있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도 하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기도 해요.”
김윤석은 ‘1987’을 바라보는 다양한 세대에 관한 어떤 믿음을 보이기도 했다. “그 시대를 겪은 사람들도 2017년의 촛불 광장을 겪은 사람 모두에게 공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젊은 분들이 공감을 못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분들이 많이 볼 거로 생각해요. 1987년은 20대분들의 부모님 세대고, 현재 2017년 촛불시위도 겪었으니. 모두 연결되고 있다고 봅니다. 거기다 부당한 것에 대해 거부하는 힘은 젊은이들이 더 세니까요.”
그 시절을 겪은 기성세대인 김윤석은 영화를 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결국엔 ‘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날을 통한 교훈이자 미래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새기면서 변화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다짐은 의미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