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훌레구와 부인]
훌레구의 부대가 타부리즈에 도착했을 때 대칸의 자리를 놓고 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가 각각 대칸에 취임해 한판 대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훌레구는 당연히 형과 동생이 다투는 당시 상황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지를 검토했을 것이다. 결론은 부정적으로 내려졌음이 틀림없다.
일단 이슬람 땅에 남아 독자 세력을 구축한 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봐가며 기회를 노려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 시점이 훌레구 울루스(나라), 즉 일한국이 탄생하는 분기점이 됐다. 훌레구는 타브리즈를 제국의 중심지로 삼아 자신의 터전을 굳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이란의 동아제르바이잔주의 주도인 타브리즈는 해발 1,360m 전후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16세기 들어 이란의 영토로 편입됐다.
◀맘루크군과 한판 승부
훌레구의 본대가 동쪽으로 떠난 후 시리아에 남아 있던 키트부카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맘루크왕조는 이 사절단을 모두 처형하고 시리아 쪽으로 진격할 태세를 보였다. 몽골군과 대적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진 = 맘루크 병사]
이 왕조는 아이유브(Ayyubids) 왕조의 군사령관을 지냈던 투르크 계통의 노예용병 아이베크(Aybek)가 아이유브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에서 일어선 신생왕조였다. 맘루크라는 말 자체도 백인 노예를 의미하는 아랍어다. 객관적으로 봐서 맘루크의 군대가 공포의 무적군대인 몽골군과 맞붙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이집트는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로 혼란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도 맘루크왕조가 북벌에 나선 것을 보면 이미 훌레구의 본대가 동쪽으로 떠나고 남은 몽골군의 병력이 비교적 소규모였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인 잘루트(Ain Jalut) 전투의 참패

[사진 = 아인 잘루트]
그 정도의 전력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길만했다. 북상하던 맘루크군과 남하하던 몽골군은 팔레스타인에서 마주쳤다. 여기서 맘루크의 쿠투즈는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Ain Jalut)로 유인했다. 수적인 우세로 근접전을 펼쳐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승산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아인 잘루트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진 = 맘루크 병사의 전투]

[사진 = ‘다윗과 골리앗’ 영화 포스터]
◀무적의 신화 깨진 몽골군

[사진 = 몽골군 중동 원정]
무적의 신화가 깨진 몽골의 위신은 크게 추락됐다. 또 서쪽으로의 원정도 더 이상 나가지 못한 채 여기서 멈췄다. 반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였던 맘루크왕조는 몽골군에 대한 승전을 계기로 이집트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실한 기반을 굳혔다.
더욱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 국가들은 맘루크왕조가 몽골의 서진을 멈추게 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군수물자 등을 제공해줬다. 이 때문에 맘루크왕조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맘루크가 북방 노예 출신이라며 야만시 했던 무슬림 세계에서도 맘루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맘루크의 수도 카이로는 무슬림 세계의 중심지로서 과거 바그다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맘루크는 1517년 오스만터키에게 멸망할 때까지 250년 이상동안 이어지는 장기 왕조가 됐다.
◀서쪽에서 멈춘 원정

[사진 = 맘루크군 모형]

[사진 = 마그레브 지역]
바다를 통한 유럽 정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됐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흥미롭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칸 뭉케의 죽음이 원정군의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이러한 가정(假定)은 가정 그 자체로만 남고 말았다. 비록 서진은 멈췄지만 훌레구가 터전을 잡은 몽골의 일한국은 150년 동안 이슬람지역에서 뿌리를 내렸다.
일한국은 위쪽에 있는 킵차크한국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그 것은 크게 봐서 몽골 제국 내부의 문제였다. 또 쿠빌라이의 대원제국을 지지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협조했다. 그들은 비록 이슬람 지역에 있지만 철저한 몽골인으로 행동했다. 일한국의 군주는 필요에 따라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무슬림의 관습을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의 기본 정신을 지키면서 현지의 종교나 전통과 충돌을 빚지 않는 것이 몽골의 특징이기도 했다.
일한국의 서쪽 진출이 멈추면서 대몽골제국의 서쪽 경계선이 정해졌다. 그 경계선의 동쪽은 팍스 몽골리카라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몽골 제국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바깥 세계에도 새로운 바람과 변화를 불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