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3] 과연 신풍(神風 :가미카제)인가?

2017-12-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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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합포를 전초기지로 2차 원정 준비

[사진 = 마산항]

경남 마산(馬山)항,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 항구는 수면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좋은 항구가 들어설 수 있는 천연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많은 섬들이 거친 파도를 막아주어서 천혜의 군항이 들어선 진해만에서도 육지 쪽으로 무려 9Km나 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산 항은 청일전쟁 이후 고종 광무 3년인 1889년에 개항했다. 개항이후 128년이 되는 마산 항은 좋은 자연 입지 조건 때문에 연 천 5백만 톤 이상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국제항으로 발돋움했다. 항구로서의 역할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기도 했다. 조창이란 배로 실어 나를 곡식을 쌓아두는 곳이다.
 

[사진 = 마산항 부두]

바로 이곳이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의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당시의 이름은 합포(合浦), 1280년, 합포는 많은 군사들과 뱃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몽연합군의 제 2차 일본 원정이 이곳을 전초기지로 다시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동행성 설치, 원정준비 독려
합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배들이 건조되고 있었고 곳곳에서 군사 합동 훈련이 실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원정 준비를 지휘한 곳은 합포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이었다. 정동행성의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바로 일본의 정벌을 상징하는 ‘정동’과 중앙정부의 지방파견 기관을 의미하는 ‘행중서성’이라는 말이 합쳐서 만들어진 기구다.

쿠빌라이는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한 전방 사령부로 이 기구를 설치했다. 정동행성이 설치된 곳은 환주산(環珠山)으로 지금 마산의 무학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산이다. 정동행성 터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몽고정이 나타난다. 정확히 얘기하면 몽골정이지만 과거에는 몽골을 중국이 부르는 대로 몽고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

3.15 소공원 앞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몽골군이 정동행성 근처에서 주둔했을 때 군마의 식수를 공급했던 우물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이곳을 기지로 삼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일본, 재침공 대비 방어진지 구축

[사진 = 일본군 전투 대비]

같은 시기 일본의 하카다 지역 일대에서도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차 원정 때 여몽연합군이 상륙했던 이 일대에는 예상되는 적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석축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위쪽 해안 지역의 기타큐슈와 혼슈 등지에도 방어망이 구축되고 군사들이 새롭게 포진됐다. 비록 태풍의 덕분이기는 했지만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일본의 싯켄 도키무네는 더욱 의기양양 해졌다.

그래서 다음해 쿠빌라이의 친서를 가지고 방문한 두세충(杜世忠)을 비롯한 몽골의 사절단을 카마쿠라에서 접견한 뒤 모두 처형해 버렸다. 1279년에는 일본과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남송 출신의 주복(周福) 등 시절단이 방문하자 아예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다이자후에서 처형했다.

하문저(何文著), 사투르 웃딘 등 사신들도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해졌다. 사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교전을 불사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일단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나타난 이상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차 때와는 달리 두 번째 격돌 앞두고 쌍방이 충분한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전쟁준비는 중국 땅 강남에서도 추진되고 있었다.

▶ 천주만 일대의 대규모 선박 건조
남송을 접수하면서 항주와 광주, 복주, 천주 등 해안 지역을 손에 넣은 몽골은 이 지역을 이용해 배를 건조하고 인원을 충당함으로써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준비된 배는 3천 5백여 척, 원정군은 10만 명 이었다. 강남을 접수한 지 5년 만에 10만의 원정군을 한꺼번에 출진 시킨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사진 =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모습과 달리 허점이 있었다. 그들은 정예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결여된 잡군(雜軍)이었다. 늙은 병사와 소년병사, 실업자 등이 대부분으로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할지가 의문스러웠다.
그들은 바로 접수된 남송 병사들 가운데 가장 전투력이 쳐지는 하급 군인과 잡부들이었다.

▶ 대부분 약졸로 구성된 강남 원정군
남송을 접수하면서 거의 전투도 없이 그냥 몽골의 그늘 아래로 들어 온 남송 병사들은 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 가운데 우수한 병사들을 뽑아 황궁 친위대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분쟁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배치했다.

그래도 아직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일본 원정군으로 선발된 병사들은 남아 있던 사람들로 대부분 약졸(弱卒)이었다. 몽골로서는 대거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을 잃어도 별 손해가 없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휘관으로 별 이름도 없는 중급 장수를 내세운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강남군은 ‘버리는 카드’의 성격이 짙었다.
 

[사진 =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그렇다고 보면 역시 주력부대는 ‘동로군’이라고 부르는 합포에서 출발하는 여몽연합군이었다. 정예부대인 이들이 먼저 일본을 공격하면 강남군이 합류해 힘을 보탠다는 것이 대략의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 저항으로 상륙 못한 채 고전

[사진 = 여몽 연합군 선박]

1281년 5월, 4만의 동로군과 9백 척의 선박이 합포를 출발했다. 1차 때보다 원정군의 숫자가 다소 많아졌지만 보급 요원 등이 많아 전력은 1차 때와 비슷했다. 이어서 항주 바깥 경원항(慶元港)에서 10만 명을 태운 3천여 척의 함대가 출발했다. 신안 유물선이 일본을 향해 출발했던 바로 그 항구, 지금의 영파(寧波:닝보)다. 함대의 편성 내용이 어찌됐건 전례 없는 초대형 함대로 바다로 나서는 장관을 짐작할 만하다.

하카다에 도착한 동로군은 이번에는 쉽게 상륙하지 못하고 물위에서 싸워야만 했다. 일본군은 미리 돌로 구축한 방어진지 뒤에서 뭍에 오르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물위에 배를 띄운 채 고전했다. 6월 기타큐슈에 도착한 강남군은 전투력이 약했기 때문에 더 더욱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당연했다. 4천척이 넘는 배들이 일본 앞 바다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7주나 됐다.

▶ 다시 덮친 태풍으로 원정 실패

[사진 = 일본 원정 경로]

8월초 다시 한 번 불청객, 태풍이 이들을 덮쳤다. 거대한 풍랑 속에 수많은 배들이 부서지고 엄청난 사람들이 물속에 수장됐다. 이 때 잃은 병력은 거의 10만에 육박했다. 주로 강남군이었고 주력부대인 여몽연합군과 전함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어차피 버리려 했던 카드가 버려진 것이어서 이때의 상실에 몽골이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 것도 두 번 모두 직접적인 원인은 태풍이었다. 일본은 이를 두고 하늘이 보낸 바람이라고 해서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연 그게 ‘신의 바람’일까?

▶ 태풍 만난 것 당연한 결과

[사진 = 태풍의 눈]

8월초에 큐슈 앞 바다로 태풍이 지날 확률은 4% 정도 된다고 한다. 한 시점을 놓고 보면 확률이 낮아 보이지만 여름 철 한 달 이상을 바다에서 오고 가지도 못했다면 태풍을 만날 확률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지난 50년 동안의 통계를 보면 1년에 평균 27개 전후의 태풍이 발생했다. 그 중 7월에서 9월 사이에 발생하는 태풍이 70% 가량 된다. 그 태풍이 가장 많이 지나는 지역이 일본이다. 태풍과 장마와 지진이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누가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정군이 태풍을 만난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거의 태풍에 몸을 내놓고 ‘날 잡아 잡수’ 한 꼴이었다. 오히려 바다 위에서 7주를 보낼 때까지 용케 태풍을 만나지 않고 버티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 잘못된 신화 가미카제
그런데도 일본이 주장하는 가미카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풍의 덕으로 적을 물리친 일본으로서는 외적 격퇴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일 법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러한 잘못된 명칭을 태평양전쟁 때 젊은이들에게 다시 붙여 인위적 바람을 일으키려 했다. 그래서 애꿎은 젊은이들만 자살특공대로 목숨을 잃었다.

▶ 태풍보다는 전략부재가 실패원인

[사진 = 일본 접근 태풍]

결국 몽골의 일본 원정의 실패를 태풍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 보다는 전략부재가 더 큰 원인이었다. 원정의 시기나 공격의 방법 양쪽 다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 천기(天氣)를 읽지 못한 무모한 원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원정시기를 태풍이 많은 여름으로 택한 것은 고려가 몽골군의 원정을 실패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이 시기를 택하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일본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가장 절호의 기회는 1차 원정 당시 우세한 전력으로 일본군을 밀어붙일 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속전속결로 밀어붙이자는 고려장수들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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