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여몽 전투도]

[사진 = 서해의 석양]
런데도 고려에 대해서는 마치 허물을 덮고 지나가는 것처럼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진 = 여몽 전투도]
나중에 삼별초 제압을 위해 바다를 건너 진도와 제주를 장악한 과정을 봐도 마음만 먹었다면 고전은 했겠지만 시도 못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삼별초 제압 때는 고려군이 합세했지만 강화정벌을 위해 고려군의 역할을 중국의 한족들에게 맡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해온 몽골군의 지휘부의 격이나 군의 규모 등을 감안해보면 아무래도 고려를 반드시 정벌하겠다는 몽골의 의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몽골군을 끌고 내려온 장수들도 최고위급의 장수들이 아니고 군대의 규모도 들쭉날쭉해서 한 나라를 장악하기 위한 정벌군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전쟁 초기에는 서방 정벌, 그리고 후반에는 남송 정벌이라는 큰 과업을 앞에 두고 있어 병력을 분산시키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여왔던 양상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 장기전의 근본 이유는 ?

[사진 = 여몽전투도]

[사진 = 말달리기 출발선]
그런데도 침공기세에 있어 약간의 강도 차이가 있었을 뿐 비슷한 형태의 몽골의 침공을 본격적인 정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고려에 대한 정서 작용 가능성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또한 두 나라 전쟁이후에 원나라가 보인 고려에 대한 여러 조치와 대응 방법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몽골이 정복전쟁에 나선 이후 섬나라 일본과 베트남 등 먼 바다와 밀림 때문에 몽골이 이르지 못한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됐다. 정복된 나라 가운데 비록 부마국이기는 하지만 국체(國體)를 유지한 나라는 고려뿐이었다. 우리의 국사 책에도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됐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됐다.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원사(元史), 그중에서도 쿠빌라이시대를 이야기하는 세조기(世祖紀)를 보면 고려를 특별하게 대우한 여러 부분이 나온다. 쿠빌라이는 여진족이 고려를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군대로 하여금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고려에 대해서는 조유(詔諭: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황제가 친히 내리다)등의 말이 따라다닌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주기도 하고 고려의 술에 관해서는 세금을 면해주기도 했다는 기록도 원사 6권 세조기에 나온다.

[사진 = 대원관계 고려사]
즉 일찍 내조했다면 원나라 종친들과 같거나 오히려 더 높은 지위를 줄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고려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원사에 등장할 정도로 고려에 대한 몽골의 관심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다른 나라와의 전쟁과 고려와의 전쟁에 접근하는 자세부터 달랐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공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은 것은 분명하다.

[사진 = 울란바토르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