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0] 몽골은 제주에 무엇을 남겼나?

2017-12-1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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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70년대 말에 항몽순의비 건립

[사진 = 항몽순의비]

제주공항에서 자동차로 20분가량 서남쪽으로 내려가 만난 항파두리성(缸坡頭里城)의 자리에는 과거 토성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대신 새로 복원한 토성과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지난 78년, 이곳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해 80년에 완공했다. 당시 6Km의 토성 가운데 922m를 복원하고 9천여 평의 대지 위에 비를 세워 외적의 침공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항쟁한 이들의 투쟁 정신을 호국을 위한 본보기로 삼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에는 삼별초군이 궁술 연습 때 사용했다는 ‘살 맞은 돌’과 김통정이 토성에서 뛰어 내린 발자국이 바위에 남아 샘이 솟아났다는 ‘장수 물’ 등 삼별초와 관련이 있다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사실 여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삼별초의 당시 활동을 되살리기 위해 후인들이 만들어낸 전설 같은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째든 삼별초의 저항을 계기로 이루어진 몽골과 제주의 만남은 특히 제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제주여인의 노래'

[사진 = 치멧차야 "제주여인의 노래"]

"제주의 비싼 분홍빛 비단으로 진투의 모퉁이를 꿰맸다. 징건물 용건물 둘 다 진짜 그대로 꿰맸다." 몽골에서 인기 있는 공훈가수 치멧차야가 부르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 ‘제주 여인의 노래’가 몽골의 초원에 울려 퍼진다. 치메차야는 울란바타르 교외 몽골 초원에서 ‘제주여인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사진 = 제주 여인 석상]

고려시대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 장수를 사랑한 제주여인이 몽골의 전통복인 델을 만들며 떠나간 몽골장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다. 국경을 넘어 이루어진 사랑의 얘기를 몽골에서 노래로 만들어 낼 정도로 제주는 몽골과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지닌 땅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실제로 살펴봐도 제주에 남긴 몽골의 흔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 목초지 발견에 기뻐한 몽골

[사진 = 제주도 말 목장]

삼별초를 제압하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던 몽골장수와 병사들은 전투의 와중에서도 한라산을 둘러싸고 있는 제주 땅에 친밀감과 함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유목민인 그들이 가축을 키우기에 적합해 보이는 땅을 발견했으니 당연히 그러한 느낌을 갖지 않았겠는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은 말들이 도망갈 염려도 전혀 없었다. 여름에는 초목들이 해안에서 산 쪽 오름으로 올라가고 겨울에는 반대로 오름에서 평지 쪽으로 내려오는 제주는 그들에게 목축하기에 더 없이 좋은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특히 넓은 지역을 정벌해 나가고 있던 그들에게 군사력 유지를 위해 몽골에서 기른 말을 중국의 강남이나 한반도 등 먼 남쪽까지 이동시켜 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합한 목마장을 찾고 있던 중이라 목축에 적합한 제주도의 땅을 보고 이내 군침을 흘렸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몽골이 한반도를 간접통치한 것과 달리 제주도를 직할지로 두고 직접 지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 제주 속에 스며든 몽골 요소

[사진 = 나담 축제 말달리기]

충렬왕 2년인 1277년, 몽골은 말 사육전문가와 함께 말 160만 마리를 제주도로 가져와 수산평(首山坪: 現 성산읍 수산리)에다 방목했다. 본격적인 목축이 시작된 것이다. 목축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몽골은 여기에서 생산된 우량의 말들을 배를 이용해 중국 땅에 공급했다. 몽골은 제주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아 이곳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등 군사적인 활용도를 높이는 곳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제주가 100년가량 대원제국의 직속령으로 있는 동안 제주 주민들은 목축과 선박건조에 동원되는 등 고초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속에서 수난을 겪은 기간이 1세기에 이르면서 목마사육법을 비롯한 몽골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목축기술과 몽골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서서히 제주인들의 생활 속으로 젖어들어 갔다.

▶ 각 분야에 남긴 몽골의 흔적

[사진 = 몽골의 말들]

낙인(烙印)찍는 법과 소와 말을 이용한 마차 끌기, 연자매 돌리기 그리고 말을 농사에 활용하는 방법 등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특히 가축의 분뇨를 연료로 사용하게 된 것도 몽골의 영향이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의 일부 언어까지 제주도 방언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몽골의 말들이 최초로 방목됐던 수산평 근처에는 피 뿌리 풀들이 자라고 있다.

이 풀은 몽골의 초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풀로 몽골에서는 70개의 머리를 지닌 풀이라는 의미로 ‘달랑 투루’라고 부른다. 이처럼 가축은 물론 언어와 식물 그리고 생활 습관까지 몽골의 것들이 제주로 흘러들어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 제주와 다리강가의 유사성

[사진 = 다리강가 일출]

이러한 몽골과 제주의 특별한 관계는 관련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되기도 한다. 몽골 국립대의 체 솝드 교수 같은 사람은 몽골 중남부에 있는 다리강가 지역이 갖는 제주도와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주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즉 다리강가에서 한민족이 거주했거나 한민족 일부 부족이나 씨족이 다리강가에서 이동해 한반도를 거쳐 제주도에 살게 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주장이다.
 

[사진 = 다리강가 위치도]

그 주장의 근거로 두 지역이 갖는 유사성을 들었다. 제주와 마찬가지로 휴화산 지역인 다리강가에는 고려성(高麗城)으로 짐작되는 고올리성이 있고 청나라가 몽골을 정벌할 때 최후의 전략기지로서 만주 황제의 주목마장이 있었으며 제주의 돌하루방과 비슷한 훈촐로, 즉 석인상이 많다는 점이 그 유사성이었다. 직접 방문해 본 다리강가 지역은 체 솝드교수의 주장대로 화산지역이었고 석인상이 많았다.
 

[사진 = 고울리 성터]

근처에 고올리성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고올리성이 과연 고려성인지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는 데다 지형 상으로 제주와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런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제주 임시 수도설’ 제기

[사진 = 다리강가 오보제]

상도 방문 때 동행했던 강원대 주채혁 교수는 수천 명 규모의 대원제국의 통치 집단과 귀족 집단을 제주로 추방했다는 설이 있다면서 이는 몽골이 제주를 임시수도로 삼으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원제국의 여름수도 상도와 제주 법화사지에서 나온 수막새기와를 비교해보면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주와 몽골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역시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다.

▶ 지금까지 흔적 남긴 백년 지배 역사

[사진 = 제주도 말 목장]

한라산 기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넓은 초지 위를 달려가는 조랑말들의 모습을 보면 평화스러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주도의 조랑말은 몽골의 조르모르가 그 기원이라고 한다. 몸집이 왜소하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 돌연변이로 생겨난 몽골 말 조르모르가 제주도로 들어와 조랑말이 됐다는 것이다.
바로 이 조랑말의 모습 속에 100년에 걸친 몽골의 제주 지배 역사가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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