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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바얀이 이끈 남송과의 최후 결전
여문환의 가세로 남송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신세가 됐다. 반대로 몽골군의 기세는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군벌에 의해 유지되던 남송의 내부를 흔드는 데는 역시 그 동안의 저항으로 이름이 높아진 군벌 여문환의 공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송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사도는 여문환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영웅으로 부상할 경우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해 내심 여문환의 승리를 바라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오랫동안의 대치 상태를 방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여문환이 적의 편이 돼 나타났을 때, 그 두려움은 훨씬 더 컸다. 남송은 내부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 됐다. 쿠빌라이는 이때가 남송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모든 준비와 계획을 완료하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을 더 사용하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화북지방에 있는 거의 모든 병사들이 남송과의 최후 결전에 동원 됐다. 준비가 갖춰지자 쿠빌라이는 일한국에서 온 젊은 장수 바얀을 남송 정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총진군을 명령했다.
▶ 도망가기 바쁜 남송군
쿠빌라이가 총공세를 선언하면서 그 동안 한 지점에 국한 됐던 전선은 이제 전 지역으로 확산 됐다.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한강과 장강을 거슬러 내려가는 몽골군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노련한 길잡이 여문환이 앞장서 뱃길을 이끄는 상황이라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육지에서는 우랑카타이의 아들 아주가 육상군을 이끌고 수군을 따라가며 간헐적으로 가로막는 남송군을 쉽게 제압해 나갔다. 수륙 양군의 무서운 기세에 남송군은 장강 하류 쪽으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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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무너진 악주
대군이 배치돼 있었던 악주도 쉽게 무너졌다. 15년 전 쿠빌라이가 물을 무서워하는 병사들에게 부적을 붙이고 강을 건너도록 했던 무한 3진의 악주는 거의 전투 한번 없이 성문을 열었다. 장강 중류의 군사요충지 악주가 몽골군의 손에 떨어지면서 남송의 붕괴속도는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도 몽골 특유의 심리전과 홍보전이 또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몽골군의 손에 들어간 악주의 병사와 주민 모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고 파괴와 살육도 전혀 없었다는 소문이 장강 변을 타고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굳이 몽골군에 대항에 싸울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남송 진영을 휩쓸고 있었다.
▶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군대
실제로 쿠빌라이는 전쟁에 나서기 전 바얀 등 장수들에게 남송 전투의 가치는 얼마나 적을 많이 죽이고 파괴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남송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접수하느냐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원칙은 쿠빌라이가 남송 전쟁에 나설 때부터 견지해온 것이었다. 전 몽골군에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살상과 파괴를 삼가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악주 인근 지역을 모두 장악하는 과정은 거의 피 흘림이 없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 됐다. 뱌얀의 대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과 주민들은 앞 다투어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병사들 대부분이 몽골군으로 편입되면서 군대의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장강을 따라 내려가는 몽골군은 전쟁에서 나선 군대라기보다는 마치 수륙 양편에서 대규모의 군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 조용한 가운데 남송 접수
1275년 3월, 남송의 가사도는 남은 군사를 모아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통제력마저 무너져버린 병사들로 몽골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송군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그 것으로 남송의 운명은 끝이었다. 물로 둘러싸여 있는 남송의 수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한 곳이라는 임안은 조용히 성문을 열고 페르시아에서 온 젊은 장수 바얀을 맞이했다. 몽골군의 임안 접수는 주민들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 쿠빌라이 수중에 들어간 중국 대륙
무조건 항복에 반대하는 남송의 마지막 세력들은 남송의 세 충신 가운데 한 사람인 장세걸(張世傑)의 지도아래 아홉 살 난 새 황제 병(昺)을 데리고 동남 연안부로 도망갔다. 그들은 2년 뒤인 1278년, 광주 남서쪽 애산도(崖山島)에서 몽골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북송 건국에서부터 319년, 남송이 세워진 지 152년 만에 중국 대륙의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고 있던 한 왕조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유리한 입지 조건에다 강력한 수군을 가진 남송이 힘을 한데로 모아 강력히 저항했다면 몽골은 남송을 접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것은 가사도의 폭정으로 내부가 분열된 상태인데도 쿠빌라이의 군대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남송을 손에 넣은 데까지 무려 8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을 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송이 무너진 것은 몽골군의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효과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스스로 무너진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한 왕조가 사라지는 대부분의 원인이 외부적인 충격보다는 내부적으로 함몰의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남송의 멸망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남송을 몽골군에게 들어다 받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가사도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보내진 유배 길에서 교살됐다. 1127년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임안이라 불리었던 항주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채 유목민 출신 쿠빌라이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됐다. 이로써 남부를 포함한 중국 전역이 몽골 정복자의 수중에 들어갔다.
▶ 중화문명권의 주인이 된 몽골족
중국 대륙은 실로 오랜만에 한 지배자의 통치아래 통합됐다. 역사상 어느 유목민족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쿠빌라이가 마침내 해낸 것이다. 수많은 유목민들이 만리장성을 넘나들며 꿈꿔왔던 거대한 정착 문화권의 정벌을 이뤄내고 푸른 이리와 흰 사슴의 자손 몽골족이 거대한 중화문명권의 주인이 된 것이다.
중국 대륙의 통일, 그 것은 바다와 육지의 제국 건설로 가는 길에 또 하나의 쉼표를 찍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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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남송정벌 작전도]
오랫동안의 대치 상태를 방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여문환이 적의 편이 돼 나타났을 때, 그 두려움은 훨씬 더 컸다. 남송은 내부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 됐다. 쿠빌라이는 이때가 남송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모든 준비와 계획을 완료하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을 더 사용하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화북지방에 있는 거의 모든 병사들이 남송과의 최후 결전에 동원 됐다. 준비가 갖춰지자 쿠빌라이는 일한국에서 온 젊은 장수 바얀을 남송 정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총진군을 명령했다.
▶ 도망가기 바쁜 남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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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남송접수 공격로]
▶ 쉽게 무너진 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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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악주(무한)의 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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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소주의 풍교]
▶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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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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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상해 예원 구곡교]
▶ 조용한 가운데 남송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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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항주]
▶ 쿠빌라이 수중에 들어간 중국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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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항주와 상해 주변 배치도]
유리한 입지 조건에다 강력한 수군을 가진 남송이 힘을 한데로 모아 강력히 저항했다면 몽골은 남송을 접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것은 가사도의 폭정으로 내부가 분열된 상태인데도 쿠빌라이의 군대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남송을 손에 넣은 데까지 무려 8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을 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송이 무너진 것은 몽골군의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효과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스스로 무너진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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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항주 서호의 달밤]
▶ 중화문명권의 주인이 된 몽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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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쿠빌라이 중국 중원 통일]
중국 대륙의 통일, 그 것은 바다와 육지의 제국 건설로 가는 길에 또 하나의 쉼표를 찍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