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덫에 걸린 남송군 분쇄
덫을 놓고 기다리는 몽골군의 장기 전략에 마침내 남송군이 걸려들었다. 양양과 번성이 차단된 채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자 남송의 가사도정권은 마침내 대규모 수군을 한강으로 북상시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내려했다. 1271년 6월, 범문호가 이끄는 10만의 남송 수군은 한강을 거슬러 양양과 번성 쪽으로 접근해 왔다.
오래 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던 몽골군은 덫에 걸린 먹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요소요소에 요새를 마련하고 수군과 육상군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의 진영 속으로 남송군이 달려들었다. 그 것은 어리석게 범의 입속(虎口)으로 달려드는 모양이나 다름없었다. 몽골군은 그 동안 숱하게 연습했던 합동훈련을 하듯 남송군을 철저히 분쇄했다. 강력하기로 이름난 남송의 수군이지만 치밀한 전략에 따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에게 힘 한번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강과 육지에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 제갈량에 버금가는 전략 구사한 유정
스스로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도록 유도해 엮어낸 승리였다. 이는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하는 잘 기획된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전투는 기동력을 최상의 경쟁력으로 내세웠던 과거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의 전투 양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키면서 승리를 일궈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출난 장수와 병사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획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작전의 승리였다. 제갈공명의 근거지에서 제갈공명에게 버금가는 작전을 구상하고 지휘한 장수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뒤 그의 참모가 된 남송 출신의 유정(劉整)이었다.
▶ 전쟁 승패 가른 한강 전투
남송이 비장의 카드로 내세운 수군이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면서 전세는 급전직하 몽골군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양양과 번성의 성안에 있는 남송군은 물론 다른 지역의 남송군에게도 엄청난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남송과의 전쟁은 이후 5년 동안이나 더 계속되지만 남송군은 몽골군에게 반격다운 반격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결국 패망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양양 남쪽 한강에서의 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 셈이다.
▶ 회회포(回回砲) 위력에 손든 남송군
하지만 양양과 번성의 성안에 갇혀있는 남송군의 저항은 이후에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여문환은 지쳐 있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성안의 주민들을 달래며 그 이후에도 2년 동안이나 더 버텼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이 바로 서쪽 페르시아 지역에서 온 거대한 투석기 회회포(回回砲)였다. 일한국의 창시자인 훌레구의 아들로서 당시 일한국을 통치하고 있던 아바카가 큰아버지 쿠빌라이에게 보내온 이 신무기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전투를 한순간에 타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무려 5백 미터 이상의 강을 건너 성안으로 떨어지는 돌덩이의 세례는 성벽과 성안의 건물을 파괴한 것은 물론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칭기스칸도 호레즘과의 전쟁에서 성벽을 공격할 때 투석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투석기는 비(飛)거리도 훨씬 길고 위력도 이전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래서 대적할 수 있는 무기나 방법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회회포의 위력은 거의 현대전의 속사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 포용력으로 여문환과 남송군 대우
쏟아지는 돌덩이 앞에서 명장 여문환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1273년 2월, 여문환은 드디어 성문을 열었다. 모든 병사들과 시민들의 목숨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 항복조건이었다. 몽골군이 이곳에 나타나 진을 치기 시작한지 4년 5개월 만에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린 것이다. 쿠빌라이는 여문환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여 성안의 병사와 주민 그리고 그들의 재산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했다.
푸른 군대의 전통인 승리 후 약탈이라는 과정이 여기에서는 생략된 것이다. 오히려 여문환과 그의 부하들에게 그때까지 보다 웃도는 지위를 부여했다. 필요에 따라 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보여준 할아버지의 포용력이 다시 한 번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 것은 남송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수도인 임안을 함락시키는 데까지는 아직도 긴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문환의 군대를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 남송 제압에 앞장 선 여문환
하지만 몽골측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건 간에 융숭한 대우에 여문환과 그 부하들은 감격했다. 4년 반이라는 긴 세월을 고립된 상태로 지나는 동안 가사도 정권은 한 차례 대규모 수군을 보내기는 했어도 그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거의 방치해 왔다. 그 것을 원망해 왔던 여문환과 그의 부하들은 적의 환대가 더욱 고맙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욱이 전쟁 기간 중에 형 여문덕까지 숨진 것을 안 여문환은 전횡을 휘두르며 남송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가사도가 여씨 군벌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지는 자와 자신을 인정하는 자 사이에서 여문환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여문환은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남송 정벌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에게는 한강 지역의 군사권을 책임지는 양한대도독(襄漢大都督)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주인을 바꾼 여문환의 선택을 당시나 후세의 평가도 변절로 보는 사례가 거의 없다. 이는 역사도 당시 여문한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진 = 장강 삼협]
오래 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던 몽골군은 덫에 걸린 먹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요소요소에 요새를 마련하고 수군과 육상군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의 진영 속으로 남송군이 달려들었다. 그 것은 어리석게 범의 입속(虎口)으로 달려드는 모양이나 다름없었다. 몽골군은 그 동안 숱하게 연습했던 합동훈련을 하듯 남송군을 철저히 분쇄했다. 강력하기로 이름난 남송의 수군이지만 치밀한 전략에 따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에게 힘 한번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강과 육지에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 제갈량에 버금가는 전략 구사한 유정

[사진 = 장강 변 물새]
특출난 장수와 병사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획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작전의 승리였다. 제갈공명의 근거지에서 제갈공명에게 버금가는 작전을 구상하고 지휘한 장수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뒤 그의 참모가 된 남송 출신의 유정(劉整)이었다.

[사진 = 몽골군 화살]
▶ 회회포(回回砲) 위력에 손든 남송군

[사진 = 투석기(회회포)]

[사진 = 투석기 폭탄]
▶ 포용력으로 여문환과 남송군 대우

[사진 = 몽골군 공성전]
푸른 군대의 전통인 승리 후 약탈이라는 과정이 여기에서는 생략된 것이다. 오히려 여문환과 그의 부하들에게 그때까지 보다 웃도는 지위를 부여했다. 필요에 따라 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보여준 할아버지의 포용력이 다시 한 번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 것은 남송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수도인 임안을 함락시키는 데까지는 아직도 긴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문환의 군대를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 남송 제압에 앞장 선 여문환

[사진 = 장강의 돛배]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지는 자와 자신을 인정하는 자 사이에서 여문환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여문환은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남송 정벌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에게는 한강 지역의 군사권을 책임지는 양한대도독(襄漢大都督)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주인을 바꾼 여문환의 선택을 당시나 후세의 평가도 변절로 보는 사례가 거의 없다. 이는 역사도 당시 여문한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