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한족 출신 중심 군대 재편
쿠빌라이는 전쟁 준비를 조용한 가운데서도 치밀하게 추진해 나갔다. 남송과의 전쟁은 과거 몽골의 정복전쟁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전쟁 준비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군대의 재편 작업이었다. 물을 사이에 두고 싸워야 하는 전쟁에서 기마 부대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몽골의 기마 부대를 배제시키는 전제 아래 진용을 다시 짰다. 대신 그 자리에는 주로 한족 출신의 병사들과 거란․여진 출신 병사들로 채웠다.
한족 출신의 병사들은 주로 화북지방의 한인 군벌들이 소유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몽골 병사들 보다 상대적으로 물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다. 쿠빌라이가 한인 군벌들의 병사를 새로운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가장 큰 목적은 당연히 남송과의 전쟁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의도도 숨어 있었다. 주로 화북지방 한인 군벌들이 병사들을 대거 남송 작전에 내어놓으면 자연히 그들의 세력이 약화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만큼 화북지방의 정세는 안정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 장기전 대비 보급망 완비
각기 성격이 다른 병사들로 부대를 재조직화해 수전(水戰)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당초부터 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원활한 보급망을 확보가 중요했다. 쿠빌라이는 과거 송나라 수도였던 개봉을 병참기지로 삼아 보급망을 철저히 완비했다. 1년 이상에 걸친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쿠빌라이는 첫 공격 목표지를 정하고 남송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 첫 공격 목표지 양양․번성
1268년 9월, 장강 중류지역의 쌍둥이 도시 양양(襄陽)과 번성(樊城) 근처지역에 10만 명에 이르는 몽골군이 나타났다. 양양과 번성은 장강 중류지역과 그 지류인 한강 유역의 관할지로서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 요지였다. 공격하는 몽골군이나 방어하는 남송군이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전투 발생지였다.
양측 모두 두 도시의 함락 여부가 남송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공격에 나선 몽골 측이나 지키는 남송 측이나 자연히 필사적인 자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 두 도시 합쳐져 지금은 양번
장강의 대 지류인 한강 중류에 자리하고 있는 두 도시 가운데 한강의 북쪽에 있는 도시가 번성이고 남쪽에 있는 도시가 양양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던 두 도시는 지금은 도시도 하나로 합쳐지고 이름도 양번(襄樊)으로 바뀌었다가 2010년 다시 양양(襄阳)으로 바뀌었다.
이 도시는 지금 호북성에서 성도인 무한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이 도시에서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강에 이르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낙양에 이르니 교통의 요지라 할만하다.
▶ 삼고초려의 현장 양양 융중
양양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를 만들어낸 곳으로 삼국지에서도 익숙한 지명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초가집을 지어 놓고 10년 동안 맑은 날에는 농사를 짓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으며 (晴耕雨讀) 때를 기다려왔던 곳이 바로 양양의 융중(隆中)이라는 곳이다. 47살의 유비는 27살의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모시기 위해 백 리가 넘는 길을 세 번이나 찾아가 예를 갖춘 끝에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고 제갈공명이 그 자리에서 천하삼분(天下三分)계를 내놓은 곳이 바로 양양의 융중이다.
학자들 사이에는 제갈공명이 농사를 짓던 곳이 양양의 융중이냐, 남양의 와룡강(臥龍江) 근처냐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양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같은 논쟁은 몽골족이 지배하던 대원제국 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민족인 금나라에게 쫓겨 강남으로 밀려가 있다가 몽골족에게 망한 남송의 인사들이 자신들이 처지가 과거 촉한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여기며 제갈공명을 더욱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활동했던 양양과 남양 두 곳에 사당이 세워지면서 애초 제갈공명이 기거했던 곳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두 곳 모두에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과 유적이 있다.
▶ 다시 역사 무대에 등장
양양의 융중은 시내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울창한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륭중(古隆中)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제갈공명을 모신 삼고당(三顧堂)과 무후사(武候祠) 그리고 초암정(草庵亭) 등이 있다. 또 유비가 유표의 부하 채묘에게 죽을 뻔했을 때 명마 적노(的盧)가 급류를 타고 도망쳤다는 단계(檀溪)도 이 곳 양양에 있다.
이 밖에 유비와 관우 등과 얽힌 여러 가지 흔적이 새겨져 있는 양양과 번성은 남송 공격을 위한 쿠빌라이 군대의 첫 번째 목표가 되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 공격 대신 토목 공사
양양과 번성의 주위에 도착한 몽골의 10만 대군은 전투에 나선 병사답지 않게 성을 공격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두 개의 성을 둘러싸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토성을 쌓아 올리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매일 계속 됐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10만 대군의 지휘는 명장 수베타이의 손자이자 우랑카타이의 아들인 아주가 맡고 있었다. 남송군의 사령관은 장강변의 군벌 여문덕(呂文德의) 동생 여문환((呂文煥)이었다. 남송은 몽골군이 공격해온다면 거의 틀림없이 양양과 번성이 될 것으로 보고 여문환이 이끄는 최정예 부대를 배치시켜놓고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몽골군은 전투에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남송군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성 밖으로 나가 몽골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는 모험도 할 수 없어 지켜보는 동안 두 성의 주변을 완전히 에워싸는 거대한 흙벽이 등장했다.
▶ 흙벽으로 둘러싼 환성전략
이른바 환성전략(環城戰略)이었다. 몽골군은 애초부터 장기 지구전을 펼칠 계획으로 성을 포위 한 뒤 흙벽을 쌓아 외부와 완전 차단시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렇게 에워싼 포위선의 총 길이는 100 Km가 넘었다. 흙벽을 모두 쌓은 뒤에도 몽골군은 여전히 성을 공격할 기미가 없었다.
몽골군 진영의 분위기는 도저히 전쟁터에 나온 군부대의 분위기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흘렀다. 군부대 주변에는 시장까지 형성돼 흥청거리는 모습이었다.
남송군은 몽골군들이 때때로 광대들의 공연을 구경하며 즐기는 모습을 성안에서 지켜봐야 했다. 초조해지는 것은 당연히 성안에 갇혀 있는 남송군이었다.
▶ 극에 달한 남송군의 초조감
무려 3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대치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성안에 물자까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서 남송군의 초조감은 거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루한 대치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 오히려 남송군이 먼저 성문을 열고 나가 몽골군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대비하고 있던 몽골군은 흙벽 뒤에 숨어서 각종 화기류를 난사하며 타격을 가했다.
남송군은 피해만 입고 성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기간의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몽골군은 몇 차례 군부대의 교대를 통해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부대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반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여보지 못한 남송군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성안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수군 양성 기회로 활용
그 동안 몽골군은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장기 대치 전략으로 시간을 벌어가며 다음 단계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다음 수순으로 남송과의 수전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그래서 대치기간을 수군을 양성하는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장강을 장악하고 있는 남송은 막강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언젠가 남송군은 수군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설 것이 거의 확실했다. 따라서 그 때를 대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몽골군이 둘러싸고 있는 양양과 번성의 바깥쪽 한강 유역은 수군의 훈련장소로서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이 때 창설된 몽골의 수군은 7만 명, 건조된 군함도 5천여 척에 이르렀다. 몽골 수군에도 몽골인 보다 한족을 비롯한 이민족이 대거 편입됐다. 몽골군의 군사훈련은 단지 수군 훈련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강을 따라가면서 수군과 육군이 연합해서 적에 대응하는 합동훈련도 자주 펼쳐졌다.
훈련이 거듭되는 동안 병사들의 물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게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수군 훈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자 몽골군은 근처 장강 지역 곳곳에 진지와 요새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언젠가 남송의 수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총공세를 단행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는 전쟁 준비를 조용한 가운데서도 치밀하게 추진해 나갔다. 남송과의 전쟁은 과거 몽골의 정복전쟁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전쟁 준비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군대의 재편 작업이었다. 물을 사이에 두고 싸워야 하는 전쟁에서 기마 부대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몽골의 기마 부대를 배제시키는 전제 아래 진용을 다시 짰다. 대신 그 자리에는 주로 한족 출신의 병사들과 거란․여진 출신 병사들로 채웠다.
한족 출신의 병사들은 주로 화북지방의 한인 군벌들이 소유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몽골 병사들 보다 상대적으로 물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다. 쿠빌라이가 한인 군벌들의 병사를 새로운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가장 큰 목적은 당연히 남송과의 전쟁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의도도 숨어 있었다. 주로 화북지방 한인 군벌들이 병사들을 대거 남송 작전에 내어놓으면 자연히 그들의 세력이 약화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만큼 화북지방의 정세는 안정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사진 = 개봉부]
▶ 첫 공격 목표지 양양․번성

[사진 = 양양과 번성 주변도]
▶ 두 도시 합쳐져 지금은 양번

[사진 = 양번 시내]
이 도시는 지금 호북성에서 성도인 무한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이 도시에서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강에 이르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낙양에 이르니 교통의 요지라 할만하다.
▶ 삼고초려의 현장 양양 융중

[사진 = 제갈공명 초상화]
학자들 사이에는 제갈공명이 농사를 짓던 곳이 양양의 융중이냐, 남양의 와룡강(臥龍江) 근처냐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양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같은 논쟁은 몽골족이 지배하던 대원제국 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민족인 금나라에게 쫓겨 강남으로 밀려가 있다가 몽골족에게 망한 남송의 인사들이 자신들이 처지가 과거 촉한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여기며 제갈공명을 더욱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활동했던 양양과 남양 두 곳에 사당이 세워지면서 애초 제갈공명이 기거했던 곳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두 곳 모두에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과 유적이 있다.
▶ 다시 역사 무대에 등장

[사진 = 고륭중]

[사진 = 무후사]
▶ 공격 대신 토목 공사

[사진 = 양양과 번성 위치도]
이러한 토목공사는 매일 계속 됐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10만 대군의 지휘는 명장 수베타이의 손자이자 우랑카타이의 아들인 아주가 맡고 있었다. 남송군의 사령관은 장강변의 군벌 여문덕(呂文德의) 동생 여문환((呂文煥)이었다. 남송은 몽골군이 공격해온다면 거의 틀림없이 양양과 번성이 될 것으로 보고 여문환이 이끄는 최정예 부대를 배치시켜놓고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몽골군은 전투에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남송군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성 밖으로 나가 몽골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는 모험도 할 수 없어 지켜보는 동안 두 성의 주변을 완전히 에워싸는 거대한 흙벽이 등장했다.
▶ 흙벽으로 둘러싼 환성전략

[사진 = 양번 환성(環城)전략]
몽골군 진영의 분위기는 도저히 전쟁터에 나온 군부대의 분위기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흘렀다. 군부대 주변에는 시장까지 형성돼 흥청거리는 모습이었다.
남송군은 몽골군들이 때때로 광대들의 공연을 구경하며 즐기는 모습을 성안에서 지켜봐야 했다. 초조해지는 것은 당연히 성안에 갇혀 있는 남송군이었다.
▶ 극에 달한 남송군의 초조감

[사진 = 몽골과 남송, 장강 전선]
남송군은 피해만 입고 성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기간의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몽골군은 몇 차례 군부대의 교대를 통해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부대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반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여보지 못한 남송군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성안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수군 양성 기회로 활용

[사진 = 성도 무후사]
언젠가 남송군은 수군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설 것이 거의 확실했다. 따라서 그 때를 대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몽골군이 둘러싸고 있는 양양과 번성의 바깥쪽 한강 유역은 수군의 훈련장소로서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이 때 창설된 몽골의 수군은 7만 명, 건조된 군함도 5천여 척에 이르렀다. 몽골 수군에도 몽골인 보다 한족을 비롯한 이민족이 대거 편입됐다. 몽골군의 군사훈련은 단지 수군 훈련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강을 따라가면서 수군과 육군이 연합해서 적에 대응하는 합동훈련도 자주 펼쳐졌다.
훈련이 거듭되는 동안 병사들의 물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게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수군 훈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자 몽골군은 근처 장강 지역 곳곳에 진지와 요새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언젠가 남송의 수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총공세를 단행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