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빨치산들 중 카투사병단(兵團)은 부대명칭을 537연대로 바꾸고 지역내 군당(郡黨) 및 면당(面黨) 그리고 지방폭도들과 합세하여, 세를 떨치고 있었다. 차일혁은 이들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예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를 마친 차일혁은 18전투경찰대대와 17전투경찰대대를 지휘하여 작전지역으로 향해 출동했다. 그때가 1951년 9월 10일 밤10시였다.
차일혁 부대는 주둔지인 전주를 떠나 자동차의 불빛을 가린 채, 차량의 엔진소리를 낮춰가며 은밀히 이동하여 자정 무렵에야 작전지역인 변산반도에 도착했다. 작전지역에 도착하자 부안경찰서의 김 경위가 그 지역 빨치산의 정보가 담긴 적정보고(敵情報告)를 했다. 보고를 한 김 경위는 육군 출신으로 예전부터 차일혁과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 만에 봐도 친근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전장에서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전우애였다.
차일혁 부대가 토벌할 변산반도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빨치산들이 빈번하게 출몰하게 되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게 됐다. 차일혁은 관광명소인 변산반도가 더 이상 빨치산들로부터 주민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철저히 소탕할 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책임감이 새롭게 들었다.
차일혁은 빨치산을 토벌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포위작전을 통해 이번 빨치산들을 토벌시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연암의 최고봉을 점령한 후 도주하는 빨치산들을 추격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 여겼다. 이를 위해 차일혁은 이병선 대대장이 지휘하는 18전투경찰대대 1중대를 실상사 쪽에서 정면으로 공격하게 하고, 2중대는 쌍선녀봉 지역을 수색해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부안경찰서 부대는 옥녀봉과 덕성봉 고지를 각각 수색하면서 가마소로 빨치산을 유인할 작전이었다.
변산반도 지역으로 들어오는 빨치산들 잠시 머물다가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일주일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지형적인 특징이 작용하고 있었다. 변산반도에는 험준한 산이 없었다. 더구나 한 쪽은 바다이고, 다른 한쪽은 들판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쪽만 차단하면, 빨치산들은 도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빨치산들은 전투경찰의 그림자만 봐도 도주하는 형국이었다.
차일혁은 이렇게 작전계획을 수립한 뒤 변산반도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부대를 작전지역에 투입했다. 9월 13일 새벽 2시였다. 이전에 수색작전을 통해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했지만, 그것은 소규모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토벌작전의 규모가 컸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 5시에 차일혁은 드디어 토벌작전을 개시했다. 가마골 작전을 끝낸 이후 빨치산과의 첫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차일혁은 이를 다행스럽게 여겼다.
차일혁은 작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빨치산들이 가장 쉽게 도주할 수 있는 들판 쪽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길이 넘는 잡초를 헤치면서 공격해야 했다. 토벌작전은 이날 오후가 넘도록 계속됐다.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아직은 햇살이 따가워서 그런지 대원들은 주먹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고지들을 점령해 나갔다. 수색정찰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18전투경찰대대 1중대가, “변산반도의 최고봉인 쌍선녀봉을 점령했고, 계곡에서 빨치산들이 버리고 간 소 1마리와 무기 등을 노획했다.”고 무전기를 통해 보고해왔다. 차일혁은 작전은 최초 자신이 의도한 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흐뭇했다.
이때 쯤 차일혁은 빨치산들을 실상사로 통하는 깎아 지르는 듯한 협곡에 몰아넣고, 계곡 양쪽의 고지에서 중화기 사격을 퍼붓도록 했다. 이른바 빨치산에 대한 차일혁 부대의 총공세였다. 그러자 빨치산들은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차일혁 부대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자 갈팡질팡하다가 해안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이미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자 빨치산들은 방향을 바꾸어 들판을 향해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곳에서도 차일혁 부대의 공격을 받고 빨치산들은 꼼짝 못하게 됐다. 빨치산으로서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도망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형국이었다. 변산반도 작전은 9월 15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때서야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빨치산 6명이 투항(投降)해 왔다. 그때 사살된 빨치산은 25명에 달했다.
투항자들의 말에 따르면, “괴뢰군 복장을 한 5명의 빨치산들이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채, 각자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머리를 쏘고 자살했다.”고 했다. 거기에는 여자도 2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퇴로를 차단당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군 장교들이었다. 차일혁은 그들을 보며, “투항했더라면 포로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꼭 그렇게 목숨을 버려야만 했을까?”하며 안타까워했다.
차일혁의 지휘한 철주부대는 이번 작전에서도 대성공이었다. 적 사살 25명, 소련식 경기관총 1정, M1소총 1정, 카빈소총 1정, 농우 1마리 등의 전과를 올렸다. 차일혁 부대는 사흘간의 성공적인 변산반도 작전을 마치고 전주로 돌아왔다. 전주로 돌아오니 대원들의 태도가 이상하게도 느슨해져 있었다. 해이해진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단체 기합을 주려는데 작전참모가 말렸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들의 군기가 다소 해이진 것처럼 보였다.
차일혁은 전투에 전념하느라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차일혁은 작전참모의 말을 듣고 속으로 웃고 말았다. 추석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토벌하러 돌아다니는 자신이 우스웠다. 관할 군부대의 민사부장이 추석을 맞아 차일혁 부대를 위문 차 방문해서 금일봉을 전달하고 대원들을 격려했다.
전쟁 중에 맞은 추석명절은 여러 가지로 감회에 젖게 마련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풍년을 기뻐하며 오곡과 햇과일로 조상께 감사드리던 팔월 한가위를 피난민 수용소에서 보내는 사람이 엄청났다.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야 할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집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차일혁은 전사한 동지들의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작은 정성이나마 전하려고 경리주임을 불렀다. 경리주임이 “이미 몇 푼씩 모아 유가족들에게 전달했다.”고 보고했다. 차일혁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을 잊지 않는 대원들의 뜨거운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렵 금산방면의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도경 보안과장이 차일혁 부대를 방문했다. 가마골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차일혁 부대원들의 전사에 대해 그를 너무 심하게 질책했던 것이 미안해 차일혁은 그의 손을 맞잡고 사과했다. 그러자 보안과장은 자신의 작전 실수로 인해 차일혁 부대원들이 죽은 것을 무엇보다 미안스러워했다.
한참 동안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한때 갖고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 마치 친근한 벗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 추석을 맞아 전쟁으로 학살당한 시민들의 합동위령제가 전주시청에서 있었다. 장내는 온통 유가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차일혁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유가족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한동안 상념(想念)에 빠졌다.
그러나 차일혁에게는 남겨진 과업이 있었다. 도내를 불안케 하고 후방지역을 불안에 떨게 하는 빨치산들을 토벌해야 되는 막중한 임무였다. 그것은 전북일보에 게재되는 차일혁의 진중기(陣中記)에 잘 나타나 있다. 차일혁의 진중기가 1951년 9월 18일부터 전북일보에 게재됐다. 첫 회는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명예도, 계급도, 지위도 버리고 미력한 힘이나마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차일혁의 각오가 그대로 묻어난 출사표(出師表)로 시작됐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동란 이후 중공(中共)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최대의 위난(危難)에 놓인 오늘, 전 민족이 총 결속하여 미증유의 대(大) 국난(國難)을 돌파하고, 조국에 있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것이 아닌가. 차일혁(車一赫)은 유격전에서 부상이 완치되기도 전에, 싸울 수 있는 무장(武裝)을 하기 위하여 명예도, 계급도, 지위도 초월(超越)하고 선배의 추천에 의하여 전투경찰 대대장, 임(任) 경감의 보직을 받고 미력한 힘을 조국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 차일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빨치산 토벌임무를 위해서 미력한 힘이나마 조국에 바치기로 했지 않는가! 차일혁은 이를 위해 어떤 임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출전(出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조국이 전화(戰禍)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싸워야 했다. 차일혁은 이를 위해 다음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일혁의 진중기는 그렇게 또 이어지고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