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골 탈환을 명령받은 차일혁은 연대급 철주부대장으로 첫 출전을 하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새삼 철주부대장에 임명될 때 전북일보에 게재됐던 소감이 생각났다. 차일혁은 철주부대장으로서 “조국의 수난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국가의 지상명령인 빨치산토벌을 완수하여 2백만 도민(道民)을 안심시킬 것”을 다짐하는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금번(今番) 상사(上司)의 명에 의하여 중책을 맡게 되니, 비재천박(非才淺薄)한 제가 이 책임을 완수할 수 있을지 송구함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나 조국의 수난기에 이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身名)을 바치기로 한 것은 이미 오래다. 국가의 지상명령인 공비토벌을 완수하여 2백만 도민(道民)을 안심시키고자 하니, 앞으로 배전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함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오로지 양심적이고 열정적이며 충성스런 청년만이 현 단계에서 요청되는 것이니, 앞으로 애국청년들은 한데 뭉쳐 조국의 국난극복에 생명을 받쳐주기 바란다.”
그리고 차일혁은 출전에 나섰다. 때는 1951년 8월 15일 새벽 5시였다. 차일혁은 가마골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또 다시 정읍을 향해 출발했다. 9시가 되어 정읍에 도착한 차일혁은 내장산, 장군봉, 신선봉, 여씨목 고지를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대대장들을 불러 임무를 하달했다. 18대대는 고당산과 신선봉을, 17대대는 내장산과 장군봉을 맡겼다. 그리고 36대대는 예비로 남겼다. 부대 지휘소는 내장지서로 정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차일혁은 부대 지휘소를 내장지서에서 신선봉으로 옮겼다.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위해 작전지역과 가까운 곳으로 지휘소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18대대와 17대대로 하여금 점령하고 있는 지역의 빨치산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도록 연속적인 공격과 포위망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쌍치면 가마골 작전을 위한 공격로를 개척하고 전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사전 포석(布石)이었다. 이 지역의 빨치산들을 소탕하지 않고서는, 쌍치면을 공격할 때 배후에서 빨치산의 기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 차일혁 부대는 가마골로 가는 빨치산들의 아지트를 차례로 파괴하면서, 철저한 수색작전을 펼쳤다. 그때서야 빨치산들이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가마골로 향하는 노령산맥 위에 난데없이 불꽃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빨치산들이 피운 봉화(烽火)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불꽃들은 전라남북도 빨치산들의 소굴인 입암산, 국시봉, 내장산, 장군봉, 회문산, 추월산, 용골산, 용추봉 등지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봉화는 저 멀리 변산반도까지 이어졌다. 서로 연락을 위한 것인지, 빨치산들이 자신들의 세(勢)를 과시하는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으나 빨치산들이 모종의 행동을 개시한 것만은 확실했다.
가마골이 어떤 곳인가? 이곳 빨치산들이 “모스크바는 함락될지언정, 가마골만은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며 호언장담했던 곳이 아니었던가. 빨치산들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증거였다. 가마골에는 기포병단, 카투사병단, 번개병단, 백안기의 정읍군당 유격대, 순창군당 등 완전무장한 4백 50여 명의 빨치산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28일 남한지역이 수복 된지도 벌써 1년이 지났는데도, 가마골은 여전히 군경(軍警)이 들어가지 못하는 ‘금단지역(禁斷地域)’이 되어 있었다. 노령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가마골은 공격하기가 여간 힘든 지역이 아니었다. 설령 가마골을 에워싸고 있는 외곽 고지들을 점령한다고 해도, 가마골로 들어가려면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밀림지대와 같은 숲속을 통과해야 했다. 그만큼 가마골 작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여건을 고려하여 가마골 작전에는 차일혁 부대를 포함하여 전남북 경찰들이 일부 합세했다. 그만큼 지형이 험했고, 빨치산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남도경에서는 전남 보안과장이 지휘하는 전남 연합부대가 합류했고, 전북의 순창경찰서에서도 가마골 작전에 힘을 보탰다.
가마골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차일혁은 빨치산들을 완전 포위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차일혁은 예하 3개 대대를 모두 투입하여 가마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고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세도 험했지만 빨치산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일혁의 예상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용추봉과 용두봉 일대에서 벌어진 교전은 정규전에 가까울 정도였다. 빨치산들은 차일혁 부대를 향해 박격포와 경기관총을 퍼부었다. 차일혁은 전남북 경찰부대로 하여금 가마골의 포위망을 좁히면서 빨치산들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남 경찰부대와 17전투경찰대대는 추월산으로 가는 퇴로를 막았고, 전남 특경대장이 지휘하는 경찰부대와 36전투경찰대대가 내장산으로 연결되는 퇴로를 막았다. 가마골 후방인 서자봉 능선에는 순창경찰서 부대가 회문산으로 연결되는 퇴로를 막았다.
차일혁의 작전지휘로 가마골을 완전히 포위됐다. 그렇게 되자 빨치산들은 최후의 발악적인 반격을 해 왔다. 그러나 빨치산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18전투경찰대대가 빨치산의 탄막을 뚫고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대대장 연락병이 쓰러지는 등 많은 희생 끝에 마침내 용추봉을 탈환하게 됐다. 때맞춰 17전투경찰대대도 용두봉을 점령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차일혁은 부대 지휘소를 재빨리 용추봉으로 옮기고, 진두지휘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전투를 통해 차일혁 부대는 사살 46명, 포로 16명, 소총 61정, 실탄 7백발, 백미 1가마를 획득하는 커다단 전과를 얻었다. 대신 차일혁 부대도 피해가 있었다. 7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당했다. 부상자 7명은 빨치산들이 쏜 포탄에 중상(重傷)을 입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가마골 작전에 들어가자 험준한 지형상 항공작전이 필요했다. 지상 작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항공폭격이 절실했다. 그래서 항공기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8월 27일 요청했던 항공기 지원이 있었다. 항공기들은 가마골의 계곡사이를 누비면서 빨치산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폭격해 나갔다. 항공폭격으로 가마골 일대는 쑥대밭이 됐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폭음이 연신 터졌다. 1시간 동안 폭격을 마치고 폭격기들이 유유히 사라졌다. 그런 엄청난 폭격에도 용케 숨어있던 빨치산들이 저항을 했다.
차일혁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최후의 돌격을 명령했다. 차일혁 부대가 맹렬히 돌격하자, 빨치산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도주했다. 차일혁은 18전투경찰대대를 지휘하여 가마골 계곡으로 내려갔다. 가마골에는 몇 백 년 묵은 칡덩굴이 우거져 있고, 다래와 으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보신병 김규수 경사, 연락병 유 순경, 전북일보 윤석호 기자와 함께 계곡 밑으로 내려갔다. 곳곳에 가마니가 깔려 있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 언제 빨치산들이 나타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며 내려갔다.
밀림이 끝난 곳에 인가(人家)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공시절’ 이후 군경(軍警)으로서는 차일혁이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차일혁은 자신도 모르게 ‘여기가 가마골’이라고 외쳤다. 빨치산들은 달아난 곳에는 토굴 같은 아지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과연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 칭(稱)할만 했다. 가마골은 완전히 ‘인민해방구(人民解放區)’였다.
각 건물마다 학교, 인민위원회 등의 간판이 걸려있어 완전히 딴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노획해 온 식량으로 술까지 담아 놓고 있었고, 발동기며 그라인더도 설치되어 있었다. 밭농사와 논농사도 하고 있었다. 곳곳에는 농사용 퇴비까지 쌓여있었다. 자동차도 4대나 있었다. 가마골은 그야말로 남한 속의 작은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었다.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가마골이 점령되자, 빨치산들은 크게 위축됐다. 반면 이를 토벌한 차일혁 부대의 사기는 크게 진작됐다. 이 작전으로 차일혁은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떨치게 됐다. 차일혁부대가 가마골에서 얻은 전과는 컸다. 사살 135명, 생포 95명, 총기 78정을 노획했다. 대단한 전과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비해 차일혁 부대의 피해는 전사 7명과 부상 8명이었다. 작전에 함께 동참했던 전남 경찰부대의 전과는 사살 114명, 생포 11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9명에 부상 9명이었다.
가마골 작전이 끝난 1951년 8월 28일, 최치환 경무관과 전남 연합부대 조재용 사령관이 가마골을 시찰하고 치하했다. 뒤이어 사후강평(事後講評)이 있었다. 치안국장을 대리하여 모든 작전을 지휘했던 최치환(崔致煥) 경무관과 신상묵(辛相默) 지리산전투경찰대사령관이 참석했다. 신상묵 사령관은 차일혁에게 “자기와 함께 빨치산 토벌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차일혁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리산전투경찰대사령부로 옮겨 이현상(李鉉相) 부대와 다시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진정한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야 말로 무부(武夫)로서의 꿈이고 바람이 아니겠는가. 그때 차일혁의 심정이 딱 그랬다.
그러나 차일혁은 그 생각을 버렸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지리산전투경찰대사령부의 예하에 있는 205연대장과 부딪치기 싫었다. 205연대장과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차일혁은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205연대장과는 17대대가 차일혁 부대에 통합될 때 17대대장이었던 그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차일혁은 205연대장을 배려해 자신이 희생하기로 했다. 다른 하나는 36대대를 창설하여 연대급 부대인 철주부대를 창설해서 부대장을 맡긴 윤명운(尹明運) 도경국장이 자신을 지리산지구전투경찰대로 보낼 것 같지가 않았다. 차일혁 자신도 자신을 믿고 부대까지 창설해 준 윤 국장의 배려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차일혁 부대는 가마골 작전을 마치고 전주로 복귀했다. 부대 본부를 기존의 전주서중에서 전주사범으로 옮겼다. 그때 미 고문관 제이미가 방문했다. 그는 차일혁 부대의 낡은 장비를 교체해 주겠다던 예전의 약속대로 소총을 M1소총으로 교체해 주고, 지프차도 새 것으로 교체해 줬다. 그로 인해 차일혁 부대는 비로소 부대다운 부대로 변모했다. 차일혁 부대의 명성이 전북도를 넘어 이제 미고문관에게까지 알려지게 됐다.
가마골 작전을 마치고 전주로 복귀한 차일혁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전북일보에 차일혁의 전투상황을 게재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사연은 이랬다. 부대로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김만석(金萬錫) 기자가 부대로 찾아와, 차일혁이 틈틈이 써놓은 전투일지와 진중 메모를 전북일보에 게재할 것을 제의했다. 차일혁은 보안상의 문제를 들어 신문에 게재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김만석 기자는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차일혁에게 자신의 제의를 받아달라며 졸라댔다. 김 기자는 종군기자로서 그동안 전투에 대해 많은 것을 취재하고 기록했지만, 실제 전투지휘관이 아닌 그로서는 전투기록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차일혁의 전투일지를 다시 정리해서 신문에 게재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기자는 그 문제를 놓고 차일혁을 설득했다. 차일혁도 어느 순간 “지금 당장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시일이 지나면 꼭 필요한 기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차일혁도 김 기자의 제의에 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전북일보에 차일혁의 진중일기가 연재되게 됐다. 차일혁은 여태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던 전투경찰의 전투상황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전투경찰의 활약상도 홍보하고, 아울러 도민들도 안심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차일혁은 그동안 정리해 뒀던 전투일지와 메모를 김만석 기자에게 넘겨주었다. 그에 따라 김 기자는 차일혁의 진중일기를 정리하느라 바빠지게 됐다. 이에 전북일보에서는 김만석 기자를 대신하여 차일혁 부대를 취재하는 종군기자로 신현근 기자를 내정했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의 진중기록이 빛을 보게 됐다. 그 계기가 됐던 것이 바로 철주부대장으로서 첫 지휘를 했던 가마골작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마골 작전은 차일혁과 인연이 깊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