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개봉한 영화 ‘유리정원’은 신수원 감독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 무명작가 지훈(김태훈 분)이 숲속 유리정원에서 홀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 재연(문근영 분)을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판타지적 요소에 현실성을 부여해 전작과 다른 결을 선보였다. 그러나 신수원 감독의 본질만큼은 오롯하다. “그저 옷을 바꿔 입은 것”이라는 그는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상처와 내면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신수원 감독의 일문일답이다
-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하하하. 개봉 전날까지만 해도 ‘어떻게 관객을 만나야 하나’ 걱정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걱정한다고 내 생각대로 가는 것도 아니더라.
- 부산 국제영화제가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의미가 깊은 건 사실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영화제고 또한 그런 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건 굉장히 설레고 영광스러운 일 아니겠나. 제 인생에서도 개막작은 처음이고. 하하하.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의미 있다. 힘을 받는 것 같다.
영화 ‘유리정원’은 전작들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작이 현실성이 돋보이는 소재를 일상 속 판타지와 접목했다면 ‘유리정원’의 경우, 판타지적 요소에 현실적 공감을 더 했더라
- 옷을 바꿔 입은 거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다. 어떤 면에서는 재연(영화 ‘유리정원’)과 준(영화 ‘명왕성’)은 같은 결을 가진 인물이다. 말씀하신 대로 ‘명왕성’도 판타지가 있지만, 메인은 아니었고 ‘유리정원’은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지점이 있다. 다른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인 재연과 지훈의 관계다. 지훈 역시 피해자고 루저의 입장이었는데 그가 같은 입장인 재연에게도 같은 상처를 주지 않나. 그런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선상이라고 생각한다.
‘명왕성’, ‘마돈나’, ‘유리정원’까지 모두 다 다른 감독님의 면면을 엿 본 느낌이다. 문근영 배우의 인터뷰를 하다가 비슷한 이야길 나눴는데 문근영 역시 그렇다고 하더라. 세 작품은 모두 감독님의 일부라고
- 아무래도 저의 분신이지 않겠나. 여러 모습이 다양하게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다양한 모습이 녹아 들어있지 않나 생각한다. 정교수조차도 저의 영혼을 넣을 수밖에 없었고 지훈, 재연 모두 저의 분신 같다. 제 머릿속에서 나오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저와 완전히 다른 면도 있고…. 어차피 창작이란 그런 것 아니겠나.
‘유리정원’의 전신이 소설이라고 하던데
- 아니다. 그건 오해다. 소설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는 게 잘 못 전달 됐다. 소설가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태에서 구상하다가 본격적으로 (대본을) 쓴 게 2013년쯤이었다. 너무 안 써져서 ‘마돈나’를 쓰게 됐고 군데군데 생각나는 점들을 ‘유리정원’에 적용한 거다.
어떤 부분에서 막혔나?
- 뻔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소설가라는 테마, 남의 삶을 훔쳐서 소설을 쓰고 상대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상황은 똑같은 데 쓰다 보면 안 풀릴 때가 있다. 뭐랄까. 그냥 진부하더라. 그래서 관뒀다가 ‘마돈나’를 쓰면서 나무 인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원래는 여자가 자살하는 이야기였는데 ‘마돈나’를 쓰면서 식물인간이라는 코드를 떠올렸고 ‘유리정원’에 적용하게 됐다. 코마 상태를 식물인간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만의 신화적인, 토테미즘 신앙이 있는 것 같다. 사물을 의인화하는 것들이 재밌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자가 죽는 게 아니라 나무가 된다는 이야기로 변형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마돈나’와 연결고리를 갖는 셈이다
- 그렇다. ‘유리정원’ 속 재연은 ‘마돈나’ 미나의 분신일 수도 있다. 미나와는 분명 직업적 면이나 성격적 면에서 다르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연상되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재연과 지훈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지훈은 표절을 혐오하는 작가지만 동시에 재연의 삶을 표절하게 됐다
- 지훈은 가장 현실적 인물이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는 테마인데 인간은 선과 악을 가지고 있지 않나.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생존과 관련된 일을 겪으면 악마로 변하는 게 사람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지훈을 그렇게 그려내고 싶었고. 재연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소심한 보복을 한다. 재연의 경우는 식물 같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동물은 어쩔 수 없이 남의 것을 뜯어먹지만 식물은 햇빛과 이산화탄소, 물만 있으면 산다. 정지한 듯 그 안에서 모든 순환이 이뤄지는데 재연이 그런 모습이길 바랐다. 일방적으로 당하지만 죽어있는 존재는 아닌 것. 그래서 마지막 엔딩 장면도 죽어가는 나뭇가지에서 재연이 새로 태어나는 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훈은 타인을 공격하는 인물로 남게 되는 거고.
숲속에서 지훈을 보고 도망치는 재연의 모습이 같은 맥락에서 소동물처럼 느껴지더라
- 저 역시도 그 장면을 좋아한다. 숲에서 찍었는데 숲은 4시 반이면 해가 떨어진다. 정말 전쟁처럼 찍었다. 그 와중에 근영 씨가 그런 서멧한 연기를 보여줘 제가 다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눈빛에 저도 바로 오케이(OK)를 했다. 모니터를 보면서 빠져드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근영 씨가 아니었다면 그 숲의 엔딩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근영 씨가 숲에 어울리는 재연 같은 인물이라는 느낌이다.
배우들의 캐스팅은 어땠나?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문근영이었는데. ‘국민 여동생’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였다
- 근영이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또 이해하고 싶어 했다. 저 역시도 미팅 자리에서 근영 씨에 대한 환상, 국민 여동생이라는 편견이 깨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여자가 피폐해 보여야 하고 기존 이미지랑 다르게 가야 할 것 같아서 (문근영에게) 살도 좀 빼고 머리 모양도 확 바뀌자고 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라는 느낌이 들길 바랐다. 근영 씨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줬었고. 제가 근영 씨에게 확신을 얻었던 건 (서)태화 씨, (김)태훈 씨, (문)근영 씨 딱 셋만 불러서 리허설했는데 뭔가 신뢰감이 팍팍 들더라. 현장에서 배우들이 또 바뀌지 않나. 그 당시에 그런 신뢰감이 들었다. ‘이 배우와는 잘 할 수 있겠다’는 마음.
영화 속 제3의 주인공은 숲이었다. 공간 헌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텐데
- 일반적인 숲을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제주도 숲도 가보고 창녕 우포도 갔었는데 여러 상황상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지역 담당자가 창녕 우포늪과 비슷한 곳을 소개해줬는데 그 근처 저수지였다. 비 오면 물이 고이고 약간 부러진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느낌이 딱 오더라. 며칠을 잠도 못 잤다. 결국 ‘여기서 찍자’는 생각이 들어 조감독에게 몇 년간 강우량 통계를 가져오라고 했다. 비가 오면 촬영을 스톱해야하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가 영화를 찍는 6월에는 큰비가 온 적이 없더라. 바로 찍을 준비를 했었다.
공간이 주는 예상치 못한 변수도 많았겠다
- 어려운 점이 많았다. 정교수가 죽을 때 카메라가 나뭇가지를 잡는데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모습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강풍기가 (습지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다. 다들 멘붕에 빠졌다. 영화가 이상해지니까. 바람 없이 찍는다니…. 그런데 우연히 조명기를 통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림자 효과였는데 스태프들도 그걸 보며 ‘너무 좋다’며 갑자기 신나서는…. 하하하. 해가 출렁이는 느낌으로 찍었는데 그 효과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숲이 도와준 것 같더라.
극 중 재연은 과학도였는데 실제 과학도를 인터뷰하면서 얻은 점도 있었나?
- 박사과정에 계신 분들을 만났다. 장소 협찬도 해주셨다. 실제로 배양액을 만드는 분들이었는데 작품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저도 모르던 걸 알게 돼 좋았고 극 중 등장하는 실험동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실험동물도 원래는 몰몬트(실험용 쥐)를 생각했는데 요즘은 제브라피쉬를 쓴다고 하더라. 그런 사소한 것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었다.
과학도들은 ‘유리정원’에 어떤 반응이었나?
-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메일을 보냈는데 한 원로교수님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협조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 실망이 컸는데 또 다른 교수님께서 ‘가능성이 있다. 과학은 계속 증명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에 굉장한 용기를 얻었다. 그 세계에도 시선의 차이가 있더라.
극 중 지훈에게 재연은 뮤즈 같은 존재였는데. 실제 신수원 감독에게 ‘뮤즈’가 있다면?
- 글쎄. 잘 모르겠다. 저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게 뮤즈 같기도 하고…. 그마저도 요즘엔 잘 안 듣는다. 그냥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거? 그런 데서 영감을 얻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