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웅의 데이터政經] 협치, 더 좋은 조건 찾기 위한 공개입찰

2017-10-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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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권에 던지는 돌발적 질문

[사진=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


'밀정'은 지난해 추석 극장가를 강타하며 화제를 모은 영화다. 송강호(이정출), 공유(김우진) 등 최고 스타들이 각종 최우수 주연상을 줄줄이 휩쓸었다. 하지만 쓰루미 신고(히가시), 엄태구(하시모토) 등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 조연들의 실감연기가 없었다면 결코 750만명 관객동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조명 뒤편엔 주·조연으로 나뉜 배우들의 몸값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격차가 심하다. 국정감사가 한창인 지금 국세청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소득 상위 1%(158명) 배우들의 평균수입은 무려 20억8000만원에 달하며 상위 10%(1587명)도 3억6700만원이었다. 나머지 90%가 벌어들인 평균수입은 고작 620만원이다. 최저임금은커녕 한 달 겨우 52만원으로 이 많은 조연들이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데, 구매력(PPP) 기준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가 넘는 OECD 회원국 대한민국 영화계의 민낯이다.
청와대 근무 시절 ‘엽기수석’이라는 독특한 별명을 얻은 유인태 전 의원이 명명한 민주주의는 '너나 할 것 없이 골고루 나눠 먹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 제1조에 민주정(民主政)을 선언한 대한민국이 유 전 의원의 말처럼 다 함께 나눠먹기는커녕 오로지 1·2번 당만이 70년 내내 번갈아가며 권력을 100% 독점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3년6개월가량 권력을 나눈 게 유일하다. DJP연합으로 불리는, 우리 역사에서 한 번뿐이었던 연정은 3번 당인 자민련이 ‘결정권’을 쥔 매우 드문 경우였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기여하기도 한 자민련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조연으로는 넘친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특징으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3번 당 이하 소수정당이 국회 다수파가 되거나 행정부 권력을 나눠 갖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유권자 의사를 의석 그대로 반영하는 OECD 정치선진국은 불과 5% 남짓한 지지율을 얻고도 연립내각에 참여해 권력을 나눠 갖는 일이 아주 흔하다. 이는 순전히 선거제도 때문이다.

선거제도가 총리를 바꾼다? 황당한 얘기지만 사실이다. 남반부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당수 취임 두 달 만에 집권 국민당을 사실상 패배시키고 사상 최연소 여성총리를 예약해둔 약관 37세의 재신더 아던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달 23일 실시된 제52대 뉴질랜드 총선은 4연속 집권에 도전한 국민당과 이에 맞선 좌파연합 모두 과반수(61석)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54석의 좌파연합은 단 2석 차이까지 따라붙었으나 ‘결정권’은 오히려 3년 전보다 의석이 줄어든 '뉴질랜드퍼스트(NZF)'가 쥐게 된다. 1978년 원내에 진출한 12선의 백전노장 윈스턴 피터스 NZF 당수는 겨우 9석(의석 비중 7.5%)을 갖고도 외교부총리를 비롯해 적(노동당)·녹(녹색당)·흑(NZF) 연정에 무려 4명이나 입각시키기로 확정했다. 8석의 노동당 연정파트너인 녹색당은 21석 각료 가운데 겨우 1명뿐이다. 아던은 ‘총리 메이커’ 피터스가 선거제도를 활용해 탄생시킨 깜짝 스타인 셈이다.

뉴질랜드는 1996년 10월 총선부터 지역구를 기존 99석에서 71석으로 축소하는 대신 우리나라에도 수없이 소개된 정당명부비례대표의원을 추가 선출하도록 고쳤다. 이른바 혼합비례대표제(MMP)이다. 그 원조이자 연방국가인 독일과 비교해 비례대표의원 배분을 주(州)별로 하지 않고 전국 단위로 한다는 점만 다르다.

마오리족 혼혈로 국민당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한 피터스는 1990년 마오리족 담당장관으로 내각에 첫발을 디뎠다. 하지만 1993년 짐 볼저 총리와 아시아계 이민정책 등의 불화 끝에 탈당해 NZF를 창당했다. 그해 총선에선 겨우 2석에 그쳤으나 3년 뒤 혼합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의원 정수가 늘면서 단숨에 17석을 얻으며 제3당으로 올라섰다. 지역구 0석이라도 정당득표율 5% 이상이면 비례의원 49석 배분에 참여할 자격을 갖는 소수정당에 유리한 제도 때문이었다.

"뉴질랜드인에 의한 뉴질랜드!"라는 선거구호로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피터스의 진가는 빛을 발했다. 국민당 집권 시기 호황국면에서 지지율이 저조하던 노동당을 사실상 승리로 이끈 헬렌 클라크 당수(당시 46세)는 좌파연합(노동당·동맹당) 50석을 앞세워 뉴질랜드 사상 첫 여성 총리직 도전에 나섰다. 첫 여성장관, 첫 여성부총리, 첫 여성당수 등 경력도 화려했다. 그러나 "연정협상은 국민당과 좌파연합 모두 공정하고 동등하게 입찰자격을 부여한다"는 피터스의 선언으로 그녀의 총리직 취임은 3년 후로 미뤄졌다.

결국 NZF의 연정파트너는 경제부총리를 제안한 옛 동료 볼저 총리에게 낙찰되기에 이른다. 2005년 9월 실시된 제48대 총선에서도 클라크가 이끄는 집권 노동당은 국민당을 상대로 아슬아슬하게 2석을 앞선 50석에 그쳤으나 NZF(7석) 및 미래연합(3석)과 연정에 전격 합의했다. 녹색당(6석)과는 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예산 및 정책연합을 하는 방식인 각외(閣外)협력에 합의했다. 이로써 클라크는 3기 집권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피터스는 요직인 외교장관, 미래연합 피터 던 당수는 국세장관을 차지하는 실리를 취했다. 녹색당은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자신의 정책가치를 지켜냈다.

선진국의 권력 나눠 갖기는 우리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장관은커녕 공기업 감사나 사외이사 자리 하나도 전리품쯤으로 인식되는 한국 정치문화에서 야당과 몫을 나누겠다는 발상은 쉽지 않다. 그러나 41% 지지율을 얻은 대통령과 40% 국회 의석을 보유한 여당만으로는 인사(안)와 예산(안)은 물론이고 중요한 개혁법률(안) 하나 제대로 처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협치라는 모호한 단어가 아니라 진짜 구체적인 방법인 '더 좋은 조건으로 권력을 나눠 먹기 위한 공개입찰'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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