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자격미달 대칸 평가
[사진 = 대칸의 게르]
"구육은 선출될 때 나이가 마흔 살이거나 아무리 많아도 마흔 다섯 살 정도로 보였다. 그는 매우 현명하고 진지해 보였으며 중간 정도의 키에 풍채와 태도가 매우 근엄하였다. 그는 좀처럼 웃거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카라코룸에서 구육을 만난 카르피니의 기록이다.
구육의 엄격한 인상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묘사는 아주 호의적인 편으로 이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은 후하지 않다. 그는 병약한데다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별로 유능하지도 않고 신뢰성도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다시 말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는 자격미달이었다는 얘기다.
▶ 허세로 망친 신세
[사진 = 구육이 이노센트 4세에게 보낸 서한(바티칸 박물관)]
여기에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허세를 부린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 허세는 구육이 카르피니를 통해 교황 이노센트 4세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20년 바티칸 공문서관에서 발견된 이 편지에서 구육은 교황이 제후들을 이끌고 스스로 찾아와 몽골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사진 = 구육의 서신 받는 교황]
언젠가는 그들이 몽골의 신하가 될 것이라면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몽골에 주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구육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대적인 서방정벌 계획을 발표하고 자신이 직접 원정을 이끌 준비를 했다. 구육은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 바투가 독립 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서진(西進)의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세습영지를 방문한다는 것이었지만 바투를 겨냥한 출정이 확실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툴루이家를 이끌고 있던 뭉케의 어머니 소르칵타니에 의해 은밀하게 바투에게 전달됐다. 바투 역시 전쟁 준비에 나섰다. 바투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볼가강을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친족끼리 대 격돌이 불가피한 듯이 보이던 이 상황은 그러나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 갑자기 죽은 구육
[사진 = 일리지역 가는 길(천산)]
구육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구육이 급사한 지역은 지금의 일리강 근처로 추정된다. 지금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이다. 시기는 1248년 4월, 대칸으로 즉위한 지 채 2년이 안 되는 시점으로 그의 나이는 마흔 셋이었다. 주치나 툴루이의 죽음처럼 구육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사진 = 칭기스칸 가묘 오르도]
바투가 보낸 자객이 구육을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 것이다. 이 역시 추측만 난무할 뿐 규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바투가 구육을 죽였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몽골제국의 세 번째 대칸 구육은 짧은 재임기간 동안 별로 한 일도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간 지도자였다. 역시 의문의 급사를 한 칭기스칸 막내아들 툴루이의 집안은 툴루이의 죽음이후 거의 몰락지경에 있었다. 구육의 죽음은 바로 이 툴루이가에게 오랫동안 꿈꿔왔던 부활의 기회를 만들어줬다.
▶ 툴루이家에 찾아온 기회
[사진 = 툴루이와 소르칵타니(집사)]
툴루이家에게 부활의 기회를 가져다 준 사람은 바로 바투였다. 구육이 대칸이 되기 전부터 툴루이가의 큰 아들 뭉케를 강력하게 밀었던 바투는 구육이 죽자 곧바로 뭉케를 대칸으로 만들기 위해 나섰다. 그 작업의 조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뭉케의 어머니이자 바투의 숙모인 소르칵타니였다.
[사진 =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사당(칭기스칸 가묘)]
우선 바투는 구육이 숨지자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과 칭기스칸 가문의 어른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제국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구육의 부인인 오굴 카이미쉬가 섭정의 자격으로 대칸의 자리를 구육의 조카인 시레문이나 어린 아들 호자에게 돌아가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바투가 툴루이가를 이끌던 소르칵타니와 합세해 뭉케를 대칸으로 밀어 올리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라 다른 변수가 작용할 여지가 없었다.
▶ 네 번째 대칸, 뭉케시대 개막
[사진 = 천산 천지(天池)]
1250년 바투는 이식쿨호수 북쪽지역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뭉케를 대칸으로 선출하려 했다. 이식쿨호수는 천산산맥에 있는 호수로서 현재 키르기스 공화국 안에 있다. 그러니까 바투는 몽골과 킵차크한국 중간지점쯤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을 선출하려 했던 것이다.
[사진 = 켈룰렌 강]
당연히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의 대표들은 쿠릴타이가 몽골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데다 참석자가 적다는 이유로 승인을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이듬해인 1251년 7월 케룰렌 강변에서 다시 쿠릴타이가 소집됐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의 대부분 사람들은 쿠릴타이가 몽골 안에서 열렸는데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참 속에 뭉케는 대몽골제국의 네 번째 대칸으로 선출됐다. 뭉케 대칸의 시대가 열리면서 툴루이家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 ‘친족 간의 피비린내’ 오점
쿠릴타이가 끝날 무렵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가문의 한 무리가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뭉케를 붙잡아 폐위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모두 체포됐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에 대한 청소작업의 신호탄이었다. 뭉케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손댄 일이 바로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을 손보는 일이었다. 섭정이었던 카이미쉬는 알몸으로 자루에 넣은 뒤 물에 빠뜨려 죽었다.
[사진 = 몽골의 숙청(현대화)]
대칸 후보로 거론되던 시레문도 같은 신세가 됐고 구육의 어린 아들 호자는 카라코룸 서쪽 지역으로 추방됐다. 대량 숙청의 피 바람 속에 처형된 사람은 거의 백 명에 가까웠다. 비록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칭기스칸 가문의 사람들은 함께 부귀를 누린다는 전통이 여기에서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