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칼럼] ‘사드’ 분쟁을 뒤로하고 서로 위해야 할 한중관계

2017-10-1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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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칼럼]

 

                                    [사진=김진호 아주경제 중국전문대기자·단국대학교 정외과 교수]



‘사드’ 분쟁을 뒤로하고 서로 위해야 할 한중관계

동북아 국제관계의 변화로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힘들어 한지도 어언 1년이 넘어간다.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놓고 시비를 따지며 논박을 하기엔 두 나라 정부와 국민이 냉전을 뛰어넘어 새 역사를 연 25년의 시간과 ‘이웃사촌’으로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던 옛정이 너무 아쉽다. 가까이 있어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웃사촌’ 이 아닌 ‘남 같은 이웃’이 되어갈 수도 있고 심지어 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제 한국, 중국 정부와 양국 국민(인민)들은 서로 우정(友情)의 샘이 더 말라가지 전에 만나 소통의 잔(棧)을 기울여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서로 못다 한 5,000년의 지난 얘기와 서로에게 나눠주며 같이 평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공동의 이익과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이제 서로 다시 만난 지 25년이 되었을 뿐이다!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대륙 동북지역을 강점했던 시기 한국인과 중국인은 모두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중국은 승전국이 되었고 한반도 국민들도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중국대륙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발생해 대륙 전역이 동족상잔 전쟁터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였고, 국민당이 1912년 남경에서 세웠던 중화민국 정부는 1949년 대만으로 이전하여 양 지역은 대만해협을 마주보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장기간 양안(兩岸)은 격렬히 대치되다가 장제스(蔣介石)의 사망 후,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총통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애국애족의 배려로 1987년부터 젊은 시절 내전으로 고향인 중국대륙을 떠나 대만에서 늙어버린 노병(老兵)들의 고향방문을 허가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삼통(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신通信)’ 교류를 유지하는 ‘대립 속의 교류’라는 관계(關係)를 유지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신탁통치되다가, 1948년과 1949년 서울과 평양에 각각 정부를 수립하고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야망으로 대남 침략을 감행하여 한민족은 3년1개월간 전국토의 80%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격렬한 전장(戰場)으로 바뀌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북한의 사생결단의 도발로 서로 교류하는 것조차 녹녹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 많은 연로하신 실향민들의 마음에 무거운 멍에만 더해가고 있고, 북의 동포들에게도 형제와 친척 및 같은 민족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남북한관계와 이와 관련된 동북아 국제관계는 더욱 복합하게 뒤엉키어 있는 상태이고,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이웃사촌인 한중관계도 악화되어 있다. 가족과 친척의 정(그리움)을 기본으로 하는 교류는 인륜(人倫)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산가족 상봉이란 체제유지를 위한 국가간 경쟁보다 동일 민족의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여하튼,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국제질서 안정을 위한 남북한의 협상과 국제적 협의는 대한민국 목전의 중요한 과제이자 주변국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1950년 중공(중국 공산당)은 국내정치적 요인과 미소대립상황에서의 중소관계 및 지정학적 이유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였는데, 국민당과 내전을 마친지 1년여밖에 되지않은 상태서 참전한 중공군(중국공산당 군대)는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도와 다시 전선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과거의 동지(同志)가 적(敵)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연합군의 후퇴와 재반격과정에서 현재의 휴전선 남북지역에서 한국군과 중국군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역사적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당시 한국을 지원했던 미국을 포함한 UN 16개 국가나 북한을 지원했던 중공군 모두 이곳 이국 땅의 전화(戰火)에서 희생이 컸고, 지금도 한반도에는 한국전쟁은 종전(終戰)이 아니라 정전(停戰)의 상태로 남아있어 그 아픔을 더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아직도 남북대치 외에 냉전적 요소가 존재하여 지역 국제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는 현실로, 이는 인류보편의 가치에서 평화를 사랑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에게 면목이 설 수 없는 부분이다. 여하튼, 한국전쟁으로 한반도 곳곳에는 한국을 도우러 왔던 그 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땀 그리고 생명이 묻혀 있고, 이들과 대치하다 사망한 젊은이들의 영혼도 남아있다.
한중관계를 보면,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우리민족과 같이 항일운동(독립운동)을 하던 대륙의 중국인들을 중공군이라는 적(敵)으로 조우하게 되었는데, 이제 우리는 이 군인(인민지원군)을 ‘영웅(英雄)’이라고 칭하는 중국정부와 중국인들과 수교하여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즉, 5,000년 역사의 이웃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쟁에 2년9개월간 참전하면서 그들이 우리의 역사적 적으로 남게 되었고, 수교 후 현재 한중 양국 정부와 국민(인민)들은 이 굴절의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국가체제가 다른 한국과 중국 두 나라는 1992년 8월 24일 수교하여 아주 빠른 시기에 가시적인 교류 실적을 이뤄냈는데, 현재는 그 추세가 약간 소강상태에 있다. 지금 동북아는 국제관계에서의 현실적 국가이익과 안보라는 이유로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고 있고, 한중 양국의 정치적 관계와 교류에도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국민(인민)들의 오래된 동양적 전통과 생활습관에서 형성된 서로에 대한 생각과 관심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국민(인민)은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정부의 정책(政策)은 지지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가까운 이웃에 대한 마음의 정(情)은 그리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젠가 한중관계가 좋아지기를 기대한다거나, 혹은 관계가 개선되면 가능한 빨리 옛 친구를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정을 나누고 싶다는 등의 동양적 인지상정(人之常情)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예(禮)를 중시하고 조상을 섬기는 동양 전통은 사회체제가 다른 한국이나 중국에 있어서도 국민(인민)들 모두의 공통적인 전통사고이자 생활습관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 2010년 여름 비가 많이 오던 날 홍콩 봉황 위성TV 기자들과 같이 파주 적성묘를 촬영하러 간 적이 있는데, 이것이 홍콩에서 방영되었고 나중에 중국정부에 보고도 되어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인민지원군 유해 반환을 요청하였다고 홍콩 방송 담당자로부터 들었다. 또한, 중국 정부의 유해 반환 요청에 우리정부도 인도주의적 입장과 발전적인 한중관계를 고려하여 응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조상을 찾아 섬기고 모시려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오래된 전통문화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공통점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정부가 2007년 1월 1일 창설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MAKRI)은 한국에서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해 신원을 확인해 가족을 찾아주는데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보훈(報勳)차원이나 인륜(人倫)적 입장에서 그 의미가 있고 본다. 이 기구는 한국전쟁 당시의 적대국이었던 ‘중공’이 1992년 한국과 수교로 ‘중국’으로 바뀐 후 2012년부터 서로의 협약에 의해 매년 인민지원군의 유해를 송환해 주고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인류보편의 예를 표하여 이웃사촌임을 인정하고 친구의 도리(道理)를 행하는 것이자, 양국관계를 중시하는 양국 정부의 정책에 기반한 예의(禮儀)일 것이다. 이러한 한국과 중국의 사상과 체제를 뛰어넘는 소통으로 2013년 6월 협약을 맺고, 2014년 437구, 2015년 68구, 2016년 36구 그리고 한중관계가 아주 좋지 않던 올해에도 28구를 포함한 총 유해(遺骸) 569구(柩)를 중국에 송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은 이에 대해 상당한 감사의 뜻을 표하며 중국 국내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과의 이러한 협력은 비록 국가관계에서 정부간 마찰이 있어도 국가와 민간의 전체적 교류에는 신의(信義)와 예절(禮節)을 중시해야 한다는 양국 지도자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공자(孔子)가 주장하기를 여러 가치 중에 ‘인(仁)’이 제일 중요하다 했는데, 이러한 양국의 협력에 ‘인(仁)’의 정신이 배경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난 금요일(10월 13일) 나는 국내 유학생 30여명이 참가한 ‘625전쟁 참전국 후손, 67년 전 전투 현장을 가다’에 동행하여 동작동 현충원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학기 단장의 특강을 듣는 것을 시작으로 전시실과 작업실도 참관하고, 경기도 광주시 도마리 ‘도마치 고개’ 유해발굴현장에 갔다 왔다. 참전국 유학생, 한국 대학생 서포터즈 그리고 국내외 기자들과 동행하며 올라 간 유해발굴현장은 국군과 우리를 도우러 온 미국과 터키의 UN군 그리고 교전 대상인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당시의 전쟁터였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약 1달간의 고지탈환전으로 서로의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곳 현장에서도 4구의 유해와 유품이 나왔다고 한다. 발굴되어 전시된 물품을 자세히 보니 그 당시 중국에서 온 이국 군인들이 쓰던 여러 물품도 보였다. 잠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 졌다. 그리고 잠시 묵념하며 눈을 감으니 당시 겁에 질려 지르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 하고, 그들의 공포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이 마음이 더욱 찡해졌다!
전쟁은 우리를 적으로 만나게도 하고 우리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데, 동양 사상인 인(仁)의 정신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으뜸으로 평시나 전시에서도 의리(義理)와 예의(禮儀)를 통해 인(仁)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논어(論語) 이인편에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鄰, 덕이 있는 자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란 말이 있다. 바꾸어 표현하여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나 그 결과를 덕(德)으로 보면, 우리가 서로 덕으로 인을 행한다면 우리는 친구이자 이웃사촌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와 화위귀(和爲貴, 화합과 평화가 제일 중요함)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서로간 전쟁도 치르고 나서 어렵게 다시 과거 동지(同志)를 되찾은 것인데, 다시 너무 쉽게 서로를 남이나 적(敵)으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인(仁)과 덕(德)으로 서로 가까워져야 할 시기가 되었고, 예(禮)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동양 전통문화이자 이웃사촌을 더 발전된 지기(知己)로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양 국민(인민)을 배려하는 정치가 국제관계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영혼들도 고향 하늘 아래 가족과 친척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또 한 곳의 한국전쟁 전장이었던 법화산(法華山) 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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